전체서비스

[공동대상] 정월향 소설 '안타깝게도 라이트세이버'
[공동대상] 정월향 소설 '안타깝게도 라이트세이버'
  • 경북일보
  • 승인 2019년 11월 14일 21시 29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1월 15일 금요일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김제정作

할매는 큰 민어의 꼬리를 잡고 도마 위로 척 던져올린다. 민어가 스스로 도마 위로 뛰어드는 것처럼 할매는 마법을 부린다. 시커멓고 큰 칼을 든 할매 앞에서 햇빛이 번쩍거린다. 눈앞에 선 적군의 능력을 가늠해보듯이 할매는 도마 위의 고기를 노려본다. 이때부터 생선들은 이미 밀리기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할매는 그 기운을 재빨리 읽어내고, 태양의 기운을 가득 받은 칼을 손아귀에 밀어넣는다. 이럴 때 할매는 라이트세이버를 손에 든 제다이 같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할매 가게로 달려간다. 기초학습 마스터 문제집을 다시 사야 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월요일에 풀어가야 할 문제집이라서 마음이 급했다.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내일까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열심히 풀면 숙제까지는 대충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할매는 수업 마치고 곧장 가게로 와서 돈을 받아가라고 말했다.

할매는 싸우는 중이었다. 할매는 반란군처럼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어떤 아줌마의 옷자락을 우왁스럽게 잡고 있다. 할매는 열심히 욕을 퍼붓는 중인 것 같았다. 새콤한 표정의 아줌마 주위로 싸움을 말리는 시장 사람들이 어정쩡하게 서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은 싸움을 즐기는 것 같다. 할매가 싸울 때 한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칼이 할매를 더욱 카리스마 넘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일진이 안 좋은 어떤 아줌마의 한쪽 소매를 잡고 욕을 퍼붓곤 하는 할매 덕분에, 나는 모르는 욕이 없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씨발놈아’하는 욕부터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져서 쎄를 만 발이나 빼고 죽어라’같은 스토리 넘치는 욕도 안다. 그렇지만 나는 어차피 말을 잘 못하기 때문에 내가 욕을 실생활에 써먹을 일은 없다. 욕으로 싸울 때면, 나도 다치지 않을 뿐더러 상대방의 병원비를 물어주게 되는 일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할매의 필살기가 마음에 든다. 시장 사람들 말로는, 할매는 험난한 세상에 40년이나 과부로 살았다. 과부가 얼마나 사람을 살기 힘들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할매가 다른 사람보다 만만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같긴 하다. ‘만만하게 보인다’는 건, 할매는 원래 쎈 축에 드는데도 사람들이 늘 약하게 본다는 뜻이다. 할매는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그런 할매를 닮았다. 애들은 내가 약해보이는 순간부터 괴롭히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나는 늘 눈에 힘을 주고 다닌다. 어른들은 우리한테 싸우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내가 볼 때 어른들의 싸움이 더 무섭다. 자기 힘이 더 세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할매의 좌판을 엎어버리거나 돈을 뿌리고 가기도 하고, ‘과부’라는 할매의 약점을 들추기도 한다. 그러면 할매는 이미 선빵을 맞은 거나 다름없다. 나는 그런 치사한 방법이 싫다. 싸울 때는 정정당당하게 욕을 하거나 주먹을 써야 하는 것이다. 스타워즈가 정말로 일어날 수도 있는 대망의 21세기에도 글자를 못 쓰는 우리 할매는 오늘처럼 이상한 손님이 오면 한 마디로, 꼭지가 돌아버린다. 시장 바닥에서 약점을 잡힐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 손님은 영수증을 못 써주겠다고 하니까 세일마트로 가겠다고 했고, 이미 다듬어놓은 생선들을 안 사겠다고 한 것이다. 할매가 안 된다고 하니까 쓸데 없는 주변의 약점들을 다 건드리다가 엄마가 없는데다가 말도 못 하는 내 얘기까지 나왔다. 그 아줌마는 죽음의 선언을 한 것이다. 곧 할매가 과부이고, 아들을 맡겨두고 시집가버린 딸이 있지만, 할매의 힘은 매우 세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 함매, 으아으아!

내가 얼른 끼어든다. 안 그러면 싸움이 생각보다 크게 번질 것이다.

- 새끼야, 좀 기다리바라.

할매가 나를 돌아보느라 아줌마를 잡은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일진 안 좋은 아줌마는 옳다구나고 빠져나와 얼른 달아났다.

- 아이고, 토껴뿌네!

할매가 원망스런 눈으로 나를 꼴아본다.

할매는 겉으로만 나이를 먹었다. 영수증 끊어달라는 손님은 주로 계산단위가 큰 손님이다. 내가 공부는 좀 못 하지만 돈계산은 더 빠를 것 같다. 할매가 학교를 다녔다면 수학은 지지리도 못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들 못 알아듣는 내 어눌한 발음을 희한하게도 다 알아듣는 걸 보면 국어 공부는 잘 했을 지도 모른다. 할매는 몸뻬 위에 걸친 꾸질꾸질하고 시커먼 전대에서 오천원짜리 지폐 하나를 건네준다.

나는 할매가 주는 비린내와 붉은 얼룩 천지인 돈을 왼손으로 받았다. 내 손가락이 돈을 놓치면서 지폐가 달랑달랑 날리다가 땅에 떨어진다.

그케 와 그 손으로 받노, 하면서 할매는 금세 눈물을 국수처럼 뽑아낼 듯한 얼굴이 되었다. 내 왼손에는 엄지손가락이 없어서 물건을 잘 잡지 못 한다. 그래도 나는 왼손만 차별하는 게 싫다. 양손 모두 골고루 쓰고 싶을 뿐이다.

- 그년아가 그리 벨라게만 안 나부댔어도고마…….

또 시작이다. 엄마의 실수 때문에 내 엄지손가락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문방구에 문제집이 한 권 남아 있었다. 혹시나 한 권도 없었으면 월요일에는 담임한테 욕을 많이 먹었을 것이다. 담임이 마귀할멈을 닮은 욕쟁이라는 것만 미리 알았어도 나는 학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목숨을 걸고 우겼을 것이다. 담임이 욕을 할 때는 입꼬리가 아래로 쳐지면서 턱이 실룩거린다. 퉁실한 얼굴과 두툼한 입술이 교대로 일그러지면서 무서운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4학년의 두 반 중에서 나처럼 춤을 재미있게 추고 오락시간에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아이도 없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말도 잘 못하고 공부도 못 한다. 결론만 말하자면, 도별성취도평가에서 우리 반 평균이 학교 평균을 깎아먹는 심각한 요인으로 밝혀졌고,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반 성적을 내 성적이 깎아먹었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조금 덜 심각한 다른 애들이랑 오후에 매일 남게 되었다. 매일 담임이 보는 데서 ‘기초학력마스터’ 문제집을 풀고 돌아온다. 할매는 내가 공부에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머리가 나쁜 건 절대 아니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할매 생각이다. 어쨌든 이번 달 문제집을 못 쓰게 돼버려서 다시 풀어야 한다. 혼자 남아서 해야 하는 방과후학습 시간은 매시간 고추가 쫄아드는 느낌이다. 여러 번 말했는데도 내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담임의 욕설이 진가를 발휘한다. 담임은 남의 약점을 건드리는 비겁한 방법으로 욕을 하기 때문에, 담임한테 욕을 들으면 기분이 많이 더러워진다. 나는 진심으로, 욕은 할매한테 먹는 것이 이만 배 낫다고 생각한다.

주인아줌마는 같은 문제집을 두 번째 산다고 문구점 카드에 포인트를 조금 더 충전시켜 주었다. 방민택이가 무진아! 무진아! 부르면서 쫓아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받은 포인트로 쫀득이를 사먹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자식은 촉새처럼 입을 나불대면서 딴 애들의 얘기를 옮기고 다니는 대표주자였다. 못 들은 척하고 뽑기 장난감을 만지작거렸다. 할머니가 생선을 팔고 나는 엄마도 없다. 그건 아무래도 ‘밥’이 될 조건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조금 더 뻐기고 다닌다. 나는 할매한테 누가 ‘나를 밥으로 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을 확실하게 물려받은 것 같다.

- 야, 야, 그거 진짜가? 니가 손가락 먹었다는 거.

이렇게 묻고 싶은 말을 바로 들이대다니, 나는 방민택에게 조금 놀랐다.

- 응…… 으아으아…….

내 얘기를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방민택이 나를 보고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잠시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할매는 이 얘기를 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어른들은 이런 이야기를 싫어한다.

방민택이는 반장이 이제 피아노를 더 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반장인 그애는 피아노를 잘 쳐서 음악시간이면 매번 선생님 대신 앞에 나가 피아노를 쳤다. 어쩌면 할매 말대로 더 얘기하면 곤란할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으면 할매한테 혼난다고 둘러대고 얼른 방민택이를 벗어났다. 내가 손가락을 먹었다는 걸 방민택이가 알았다면,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조금 슬퍼져서, 나는 시장과는 반대 방향인 아파트 놀이터를 향해서 걸었다. 정오의 햇빛이 눈부셨다.

제사용 고기는 겉손질만 하고, 다른 생선들은 굽기 좋은 크기로 토막토막 자른다. 눈이 침침한 할매지만 생선 손질은 눈 감고도 한다. 할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꼬리서부터 거꾸로 훑어서 비늘을 긁어낸다. 비늘은 여기 저기 툭툭 튀면서 빛을 흩어놓는다. 스삭거리는 소리에 귓불이 간지럽다. 할매는 광선검 라이트세이버를 어깨까지 들어올리고 손목을 뿌리듯이 힘을 준다. 꼬리지느러미가 뚝딱 잘린다. 깔끔하게 뚝 끊어진다. 다음에는 등지느러미, 배지느러미 순이다. 배지느러미를 잘라낼 때는 생선의 항문까지 연결해서 꾹 누른 다음, 칼끝을 구멍에 넣고 내장을 훑어 빼낸다. 내장은 도마 밑에 있는 붉은 다라이에 쏟아내리고 생선을 획 돌려서 머리를 자르는 것이다. 도마에 딱, 소리가 나면 꼬리가 없어지고 또 소리가 나면 지느러미가 없어지는 식으로 생선은 점점 깔끔하게 정리된다. 햇빛이 쩍, 하고 도마 앞에서 멈출 때마다 생선 조각이 작아진다. 광선검이 뚝 떨어질 때마다 검붉은 피가 도마를 물들인다. 그 위로 눈 내리는 것처럼 촤라락 희고 굵은 소금이 뿌려진다. 그리고 할매는 허리 주머니에서 검은 비닐봉투를 꺼내서 생선을 담아 휙휙 두 바퀴 감은 다음에 봉투 하나를 더 싸서 묶는다. 할매 손은 스카이워커가 된 루크처럼 움직인다. 그러는 동안 할매 주위는 뭉개진 지느러미와 붉은 피로 우글쭈글하다. 할매의 스웨터와 고무장갑에도 지워지지 않는 비린 얼룩이 한가득이다. 다 쓴 칼은 행주로 쓱쓱 닦아서 햇빛을 많이 받도록 다시 눕혀놓는다. 할매한테서 나는 생선 냄새는 햇빛 좋은 날의 바다냄새랑 비슷하다. 오늘처럼 더운 날에 파리를 쫓기 위해 피우는 쑥연기 냄새도 향긋하게 어우러진다.

나는 엄마가 도무지 기억이 안 나지만 할매 말에 따르면, 엄마는 ‘남자 없이는 못 사는 년’이었다. 그래서 결혼도 안 하고 아빠도 없이 나를 낳았다. 그러고는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저만 시집 가버린 년이다. 그 때 할매는 엄마가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시켜서 외지로 보낸 걸 뼈저리게 후회한다고 했다. 엄마는 엄마이면서도 늘 새로운 남자가 있었다. 얼굴은 별로 안 이뻤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할매랑 내 얼굴이 시커멓고 둥글둥글한 것을 보면, 엄마도 이뻤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앨범을 찾아보면 잘 나온 사진도 없다. 그래도 어려보이기는 해서 남자를 데려오기까지는 잘했는데, 그 다음에 옴팡 깨지는 흠이 있었단다. 그 흠이 바로 나였다. 그래서 엄마는 맨날 할매한테 나를 봐달라고 졸랐다. 할매는 장사도 해야 하고 무릎도 아파서 안 된다고 했다. 여덟 번째로 결혼하겠다는 놈팽이를 데려왔을 때, 할매는 더 이상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큰 은행에 다니는 사람이라서 생각보다 아깝기도 했고 이번에도 깨지면 정말 끝장일 것 같았다고 했다. 나 같은 동생이 또 생기기라도 하면 진짜 큰일이니까 말이다. 할매는 무릎을 포기하고 나를 선택했다. 그래서 엄마는 더 못생겨지기 전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러니까 나는 다섯 살이었다.

할매한테 나보다 더 어린애가 하나 있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다. 오늘처럼 한바탕 풀썩거린 날 밤이면 그 어린애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난주에도 할매는 가게 뒷방에서 소주를 마셨다. 할매는 내 얼굴에 구멍이 생기도록 쳐다보면서 니가 없으면 나는 몬 산데이, 하고 말했다. 그러더니 눈물을 국수처럼 죽죽 뽑아내는 것이었다. 할매는 완전히 꺼이 꺼이, 하고 울었다. 술에 취한 할매 손은 평소보다 더 힘이 세고 뜨거웠다. 그날은 할매 주머니에서 ‘양입’인가 뭔가 하는 글자가 적힌 서류가 삐죽 나와 있었는데, 동사무소에서 받은 서류를 읽지 못 한다고 어떤 공무원이 얌통머리 없게 굴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오전에 조기 도매업자하고 싸웠던 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애가 나올까봐 조금 불안했다. 아니나다를까 할매 손아귀의 힘이 좀 약해질 무렵 그 어린애가 나왔다. 혀 짧은 소리로 오빠야 내 쫌 업어도, 하면서 잉잉 울었다. 어린애는 나를 자꾸 끌어안았다. 얼굴은 분명히 할매 얼굴인데 말은 어린애가 하는 것이다. 그 어린애는 소주를 넣어주면 견디지 못하고 뛰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소주를 먹어봤지만, 맛도 없고 목이 따갑기까지 한지라, 아마도 그게 벅차서 뛰쳐나오는 걸 거다. 어린애한테 왜 우냐고 물었더니 무릎이 아프다는 둥하면서 횡설수설한다. 역시 소주는 먹을 게 못 된다. 내가 할매를 업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어린애를 안고 토닥토닥하다보면 ‘오빠야’ 소리도 안 하고 얌전히 누워있다. 할매의 울음이 흑흑, 으로 바뀌었다가 응응, 으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조용해지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은 어린애를 달래다가 내가 먼저 잠든다. 그 어린애는 내가 오빠인 줄 알고 있는데 내가 먼저 잠들어버리다니 조금 민망하긴 하다. 어쨌든 어린애가 사라질 동안 그 어린애를 달래줘야 한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다. 어쩌면 할매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다음 날에도 할매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밥을 차려놓고 쌩하고 나가고 없었다. 어린애가 나오지 않은 상태의 할매는 호크아이이고 토르이고 헐크맨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쎈 것 같다. 광선검 라이트세이버를 든 루크 스카이워커가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기운 쎈’ 할매가 자랑스럽다.

금요일의 햇빛은 내 십년 생애 중 어떤 날보다 더 눈부셨다. 새카만 내 마음에 하얀 해가 빛나고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반장이 나한테 와서 같이 ‘방방’ 하러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때 내 마음은 이미 방방 위에 떠있었다. 공부는 좀 못 해도 싸움은 잘 하는 내가 스스로 자랑스러워 우쭐거렸다. 반장도 반에서 제일 쎈 내가 마음에 든 것이다. 나는 그애와 같이 문구점에서 눈물꼬치와 슬러쉬를 마셨다. 맵고 차가운 것이 뒤섞이면서 화끈하게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나는 ‘쎈 남자’답게 그애를 신사처럼 챙겨주었다. 저녁에 그애와 같이 먹을 햄버거도 사서 가방에 넣어두었다.

공터에는 아이들 여럿이 이미 방방 위에서 공중부양을 거듭하고 있었다. 방방 위에서 그애는 엄지손가락이 없는 내 왼손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우리는 뛰면서 머리를 부딪쳤고 까르륵 웃었다. 많이 구르고 많이 무너졌다. 우리는 여러 가지 우스꽝스런 자세로 하늘에 올랐다. 햇빛이 눈부신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햇빛의 손가락들이 나를 한가운데 서도록 이끌어주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애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 웃었다. 체육시간에 뜀틀 시범을 보이거나 피구시합을 할 때도 축구 슛을 연습할 때도 나는 햇빛이 손짓하는 길을 따라 움직이곤 했다. 그러다보면 구석에 있던 내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애와 나는 여러 번 끌어안으며 헝클어졌다. 나는 빛이 되고 공기가 되었다. 하늘의 푸른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었다.

세상의 중심이 나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어떤 아줌마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묶은 머리인데도 세련돼보였고, 하늘하늘한 꽃무늬 블라우스에 액세서리 목걸이도 고급스러워보였다. 날씬한 다리 아래에서 금색하이힐이 반짝거렸다. 다섯 살 때 이후에 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히 엄마였다. 못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예뻤다. 생각보다 키도 더 크고 날씬했다. 엄마가 손을 저으며 어서 내려오라는 신호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날기를 멈추고 멍 때리는 나 때문에 그애가 넘어졌다. 그애는 중심을 잃고 방방 위에서 뒹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애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애는 다른 아이들에게 휩쓸리지 않으려고 방방 모서리를 잡았고, 끝에 붙은 스프링에 손가락 하나가 걸려버렸다. 내가 열심히 그애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방방 주인이 와서 날고 있는 아이들을 다 아래로 내려놓을 때까지 그애는 손가락을 빼지 못했다. 나는 가방 속에서 기초학습 마스터 문제집을 꺼내 몇 장 죽죽 찢어서 그애의 손에 감아주었다. 한참 뒤에 그애의 엄마가 오고 피와 울음으로 얼굴이 붉어진 그애를 데려갔다.

손가락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저녁에 시장 아줌마들 말을 들으니까 그애의 살점은 많이 없어져서, 결국 끊어진 손가락을 접합하지 못했다고 했다. ‘절망’적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절망은 새끼제비를 바라보는 것이다. 집 앞에 떨어진 어린 제비를 주운 적이 있다. 스스로 먹이를 잡을 줄 몰라서 나는 칼끝으로 녀석의 입을 벌리고, 파리채로 잡은 파리를 넣어주었다. 그렇지만 제비는 사흘을 넘기지 못 했다. 어린 내 손에 겨우 들어오던 그 녀석을 살리려고 심장을 문질러주던 순간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기억한다. 그런 게 절망적인 거다. 나는 그 절망을 뒷산에 묻었다.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을 때 절망이 온다. 무언가 공짜로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은 무언가 잃어버릴 순간이다. 그애가 왔을 때, 내 인생엔 없다고 믿었던 엄마가 나타났고, 그애는 손가락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그애를 잃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졌다. 이 절망도 뒷산에 묻어버릴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엄마 때문이었다.

저녁에는 그애와 먹으려던 햄버거를 혼자 다 먹었다. 약간 신맛이 났다. 내 몫의 햄버거를 먹어치우고 그애 몫의 햄버거를 먹을 때 햄버거 속에서 오돌한 뼈 같은 게 씹혔다. 씹어도 씹어도 잘 넘어가지 않아서 그냥 꿀꺽 삼켰다. 그런데 햄버거를 다 넘기기도 전에 그 뼈 같은 것이 식도 어디쯤에서 꿈틀, 하고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힘쎈 누군가에게 배를 얻어맞아서 창자가 흔들린 느낌이었다. 그애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소화되다 남은 눈물꼬치와 슬러쉬를 몽땅 토했다. 구질구질한 것들이 많이 나왔지만, 손가락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내 명치께에 분명히 뭔가가 살게 된 것 같았다. 그것은 거머리처럼 길쭉한 녀석이었다. 끈적거리고 흐느적거렸다. 그것은 내장을 헤집고 다니면서 요란하게 몸을 뒤척였다. 현기증이 났다. 하늘이 노래지고 울렁증이 났다. 할매처럼 내 속에 다른 어린애가 생겨나는 것일까. 그 어린애가 나를 부수고 튀어나오는 것일까. ‘쎈 남자’ 답지 못하게, 아직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찌질한 마음이 들었다. 가슴이 많이 아프고 억울했다. 분노 비스무리한 것이 튀어나오다 갈비뼈 중간에 턱 걸리는 느낌이었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할매한테로 곧장 가고 싶지 않았다. 그애가 사는 문화아파트 놀이터로 갔다. 세 가지 색으로 된 예쁜 놀이기구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놀이기구들이 외로울 것 같아서 나는 모든 놀이기구에 한 번씩 올라가 앉아주었다. 그러다 미끄럼틀 꼭대기에 섰다. 햇빛이 훨씬 가까워졌다. 햇빛을 쳐다보고 있으면 저절로 눈이 반쯤 감긴다. 눈앞이 아릿하게 흐려졌다. 칠월의 나뭇잎이 이마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손가락이 만든 네 개의 그늘이 눈꺼풀에 느껴졌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꺼풀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햇빛 속에서 할매가 떠올랐다. 생선을 만질 때 할매는 정말 멋있지.

나는 할매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할매 가게로 가는 시간이 꽤 늦었다. 얼른 문제집도 풀어야 하는데……. 나는 미끄럼틀 통로를 타고 꼬불꼬불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땅에 도착했다. 어두운 통로 맨끝에 누웠다. 방민택이는 그애 손가락이 스프링 사이에서 완전히 훼손되어서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먹은 것은 그애의 손가락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거기 들어갔을까? 토했을 때 왜 나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엄마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시장 사람들이 둘러서서 할매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다. 할매가 또 싸우는 모양이었다. 얼른 달려갔더니 그애의 엄마가 할매 옆에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친절해보이는 아줌마였는데 오늘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서있었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 손가락을 먹었다는 거요.

- ……

할매는 생각 외로 너무 담담했다. 할매는 도마 위에 있던 생선찌꺼기들을 다라이 밑으로 훑어내리고 다라이를 다시 도마 밑으로 밀어넣었다.

- 너무 소름끼쳐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다른 아줌마들이 저렇게 따졌으면 벌써 끝장났을 거다. 내 눈에는 감정을 누르느라 여러 번 굳어지는 할매 얼굴이 보였다. 대답이 없으니, 그애 엄마는 점점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할매는 지금 다른 때보다 훨씬 친절한 거라고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먹는 게 자랑할 일은 분명 아니었다. 그애 엄마를 보니까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애 엄마는 비쩍 마른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 어쨌든 당신 손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피아노 영재 소리를 듣던 애였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소문까지!

그애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장 바닥에 주저앉더니 아예 통곡을 하고 있었다. 예쁜 옷에 비린내가 밸 것 같았다.

- 방방은 같이 탔는데, 우리 아 때문이라꼬만 카믄 우야노.

할매는 갑자기 옆에 있던 생선을 집어 거칠게 다듬었다. 갈치였다. 먼저 꼬리지느러미가 뚝 끊어졌다. 갈치가 평소보다 더 적은 크기로 토막토막 잘려서 비닐봉지에 담겼다.

- 그래. 그런 마음은 백분 알겠는데, 오늘은 마 이거 갖고 집에 가라. 지금 시점에 내가 뭐를 우째주겠노.

그애 엄마는 할매가 건넨 생선 봉지를 집어던져 버렸다. 비싼 갈치 토막들이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애 엄마는 얼굴을 직각으로 세웠다. 이목구비가 두드러진 그애 엄마의 눈빛은 요괴군단의 눈빛처럼 살벌했다.

- 손가락이 하나 없다면서! 그런데 우리 애도 그렇게 돼서…… 몸서리가 쳐지거든! 제발 부탁인데, 당신 손자하고 우리 애, 절대로! 절대로! 부모도 없는……

고, 마, 해, 라, 할매가 딱 한번 소리쳤다.

그애 엄마가 벌떡 일어서면서 오른쪽에 쌓여있는 궤짝을 잡아당겼다. 궤짝이 무너졌고 생선들이 피와 비린내가 섞인 진흙 바닥에 쏟아져 뒹굴었다. 그 위로 그애 엄마의 구둣발이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할매의 좌판 앞에서 물고기의 뼈와 살과 피가 무시로 엉켰다. 그애 엄마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비린내가 물씬거렸다.

할매는 칼로 도마를 박박 긁으면서 검고 붉은 피와 내장들을 다라이 속으로 쏟아내렸다. 할매는 두통을 참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할매 눈이 생선 눈처럼 담담하게 식어 있었는데 점점 내가 아는 눈빛으로 바뀌어 갔다. 그 눈은 할매가 소주를 마셨을 때 나오는 어린애의 눈이었다. 그 어린애가 할매 얼굴 속에서 웃고 있었다.

- 엄마, 잠깐만! 내가 이거 해주께에.

어린애는 아무 일 없는 듯 아주 명랑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린애는 아니, 할매는 큰 칼을 어깨 위로 불쑥 들어올렸다. 칼 위에서 햇빛이 번쩍거렸다. 할매는 손목에 반동을 주면서 도마 위로 칼을 떨어뜨렸다. 칼이 떨어진 곳에는 할매의 왼손 검지손가락 하나가 뚝 끊어져 있었다. 검붉은 피가 도마를 흘러 생선 내장이 담긴 다라이로 떨어졌다. 나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문제집을 찢어서 할매 손에 감았다.

그애 엄마가 혼비백산하고 돌아가고 난 뒤에 구급차가 왔다. 나는 할매의 검지손가락을 주워서 검은 비닐봉투에 넣고 실려가는 할매를 따라서 차에 탔다. 어린애가 사라진 할매는 피가 잔뜩 묻어 흐물흐물해진 내 문제집조각들을 버리고 새 종이를 찢어서 손에 감고 있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죽는 것도 참 힘드네.

- 으아으아으~ (개안타, 할매는 제다이라서 잘 안 죽을끼다.)

나는 할매가 정말로 죽을까봐 겁이 났다. 할매가 나이가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죽을까봐 겁이 난 것은 처음이었다. 할매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 너거 엄마가 니 데불고 간다카드라.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시댁에 내가 있다는 말을 다 했고, 나를 키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일주일 전에 벌써 입양 서류를 할매한테 보내왔었다고 했다. 그럼 할매가 무릎이 아팠던 것이 엄마 때문이었나? 어린애를 불러온 것이 엄마였다고? 생각보다 예뻤던 엄마가 떠올랐다. ‘양입’이라는 서류도 생각났다. 아니, ‘입양’이라고 했다. 엄마가 나를 향해 흔들던 예쁜 손가락도 떠올랐다.

- 으으 함매으?

- 장사해야지.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엄마 아빠가 생기면 좋은 점들을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애 엄마한테서처럼 ‘부모 없는 자식’같은 말은 안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남편이 은행에 다닌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친구들이 갖고 있는 닌텐도나 아이팟같은 장난감도 생길지 모른다. 다른 아이들의 ‘밥’이 되지 않기 위해 쎈 척하고 다니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잘하게 돼서 나머지 공부를 안 하게 될지도, 그래서 담임의 욕 같은 것은 안 들어도 될지도…… 모른다. 예쁜 엄마, 부자 아빠와, 어린애랑 가끔 몸을 바꾸는 할매. 그런 계산들로 ‘쎈 남자 정무진’의 머릿속이 치사해지고 있었다. 생선비린내랑 할매의 피비린내가 섞여있는 고약한 냄새가 검은 비닐봉지에서 올라왔다. 할매 손가락이 잠깐 움찔거린 것 같았다. 거기에 놀랐는지 내 뱃속에 있는 그애 손가락까지 움찔거렸다. 나는 구급차에서 먹은 것을 토해버렸고 거기서도 그애손가락은 나오지 않았다.

일요일에 나는 다시 문제집을 사러 갔다. 문구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월요일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학교에 문제집 숙제를 갖고 가지 못 한다. 나는 사흘만에 인생이 뭔지 다 깨달은 느낌이었다. 내일까지 문제를 다 풀어야하는데도 나는 문제집조차 구할 수 없는 것, 이런 문제들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것, 이렇게 얄랑꾸리한 것, 그게 인생이다……. 나는 내 인생의 초급편을 속성으로 마스터한 느낌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터널 여러 개를 지나다가 어른이 될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 열한 살이고 그래서 아직은 할매처럼 제다이가 되지는 않아도 된다.

나는 팔을 늘어뜨리고 아파트 미끄럼틀로 갔다. 나는 한참동안 미끄럼틀에서 눈 감고 하늘 보기를 했다. 감은 눈꺼풀 위로도 햇살이 손가락을 흔드는 게 다 보였다. 빛은 다만 손가락을 흔들 뿐 오라고도 가라고도 명령하지 않는다. 누가 쎈지 약한지 계산하지 않고 그냥 골고루 비춰주는 것. 그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나는 햇빛한테 토요일 미술시간에 그림 그린 것을 얘기해주었다. 그림 그릴 주제가 ‘즐거웠던 일 그리기’였다. 머릿속에는 가장 슬픈 일이 떠올랐지만 그걸 그렸다가는 담임에게 욕을 무진장 얻어먹을 것이었다. 칠월의 햇빛이 눈부셨다는 생각에 나는 햇살이 잘 보이도록 하늘 색깔을 새카맣게 그려넣었다. 밤에도 해가 떠있다고, 애들은 막 웃어댔다. 역시 넌 웃겨, 애들은 그렇게 말했다. 햇빛이 까르르 웃었다. 나는 까만 하늘 아래에서 그애와 내가 방방을 타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햇빛이 나한테 물었다.

- 니 뱃속에 아직도 있나, 내 손가락?

- 어. 잘 있다.

- 혹시 할매 손가락도 먹었나?

할매 손가락은 더운 날씨에 더러운 것들이랑 섞여 있었기 때문에 세균에 감염되었다. 그래서 결국 접합 수술을 하지 못 했다.

- 할매 손가락은 그냥 병원에 있다.

햇빛은 내 왼손에 입을 맞춰주었다.

- 니는 엄마한테 갈 거가?

햇빛이 나한테 물었다. 나는 심각해졌다. 내가 엄마한테 가버리면 문제가 많아질 것 같다. 정말로 스타워즈가 벌어질 수도 있는 대망의 21세기에 글자도 모르고 40년을 과부로 산 우리 할매가 뒷방에서 술을 먹을 때,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애가 또 나오면 누가 안고 토닥토닥 해줄 것인가. 그렇다고 할매가 엄마처럼 은행원하고 결혼할 수도 없고, 어쩌면 이번에는 무릎 말고 손가락도 쑤실지 모르는데, 어린애는 또 오빠를 찾을 거고, 그때 오빠인 척 해주는 내가 할매 옆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인생 총 10년 8개월. 그 중 반은 엄마가 있는 생활을 했고, 또 반은 엄마 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니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공평한 것이다. 모든 것은 내 선택에 달려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에 대한 기억을 조금은 갖고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엄마의 얼굴은 안 떠오르고 나를 밀어내던 손가락만 생각난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울고 있었고 엄마는 막 다그쳤다. 그러면서 엄마의 검지손가락이 내 이마를 몇 번이나 밀었다. 나는 짭짤한 눈물 콧물을 마구 먹으면서 뒷걸음치다가 넘어졌다. 얼굴이 일그러진 엄마가, 울면서 일어나는 나의 이마를 또 밀었다. 내 고개는 자꾸만 뒤로 젖혀졌다. 붉고 찌그러진 얼굴이 자꾸만 다가왔고 나는 막다른 벽에 등을 부딪쳤다. 머리 위로 무거운 것들이 쏟아졌다. 왼손이 많이 아팠다. 요즘도 가끔 꿈에서 엄마를 본다.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 손가락이 보인다. 나는 다가오는 손가락들에게 이마를 밀리고 또 밀리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그 때는 손에서 피라도 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엄마가 아니라 손가락이 참 무섭다.

- 안 갈 거다!

나무는 푸른 손을 계속 흔들었다. 우리는 미끄럼틀 위에서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거나 미끄럼틀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위에서 세상을 보아도 아래를 걸어다녀도 끝이 보였다. 눈물이 국수처럼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다. 눈을 감고 보는 하늘도 할매 말투로 하면, 참 우라지게 파랗다. 이마 위로 나무들이 손가락을 흔들어대지만 잎들은 오라고도 가라고도 안 한다. 햇빛과 나는 서로 나뭇잎처럼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할매와 그애와 나의 손가락 개수는 총 스물일곱 개다, 루크 스카이워커라면 없어진 손가락도 다시 만들텐데,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가락 하나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계속될 수 없는 때가 오는 것.

- 내 인생에는 와 이렇게 적들이 많노.

집에 돌아온 할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할매가 고기 박스가 다 도둑놈 같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둑놈을 무찌르는 느낌으로 한 상자 한 상자 수레에 담아올린다고 했다. 할매는 그 무릎으로 매일 계단을 오르고 빨래를 하고, 수레 끌고 일을 나간다. 할매는 매일매일 요괴군단과 육박전을 벌인다. 조기 도매업자도 적군이고, 싸가지 없는 아줌마들도 적군이고, 글자도, 그 어린애도 적군이다. 만날 하는 말들을 늘어놓는 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되긴 했다. 할매한테 얼른 또 그 어린애가 나와서 꺼이 꺼이, 에서 응응, 으로 바뀌고 그렇게 울음을 그치고, 그러면 또 괜찮아져서 다음날 아침에는 일찍 일을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쎈 남자답게 당당하게 대답했다.

- 아으어으 어으 아으아……! (히어로는 원래 적들이 많다!)

경북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