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지산(芝山) 이종능 "도자기는 한국적이어야" 틀 깨고 다양한 창작

이종능昨 '멋진 인생을 위하여'

"내 스승은 나의 어머니, 고도(古都)경주, 그리고 자연입니다."

흙이 시키는대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그래서 결국 흙을 닮아 흙같은 사람이 돼버린 도예가 지산(芝山) 이종능(51).

그는 흙을 찾아 전국을 헤맨다. 그리고 흙을 가져다 열 달 동안 뱃속에 아기를 품어 낳듯 하나하나 도자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흙과 불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예가 지산(芝山) 이종능

오늘날 모든 문화가 거짓에 오염돼 가고 있음에도 아이처럼 천진한 그의 눈망울에 쉽게 매료되는 것은 '흙과 불의 거짓없음', 충격적인 그 한마디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경주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신라의 역사와 신라의 숨결과 친숙해 질 수 있었던 지산이 흙을 만지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른다. 흙으로 작품을 만들고 그 속에 신라의 얼을 심어놓고 느리게 울려 퍼지는 황토빛 '삶의 교향곡'을 듣는다.

도예가인 지산에게 불을 지피는 일은 생활 그 자체다. 찬 바람이 아직도 살 속으로 파고드는 봄의 초입, 그의 삶터이자 작업터인 '지산 도천방'을 찾았을 때 왜 그토록 마음이 쉽게 편해지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답은 쉽게 찾았다. 자연의 모습처럼 편하게 빚어놓은 흙가마, 지산의 황토빛 삶의 교향곡이 얼마나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가를 느끼면서 부터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관음1리 734번지. 경주를 떠나 절골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서 '지산 도천방'을 마련한 이종능씨는 자신이 빚어내는 도자기에 '토흔(土痕)'이란 브랜드를 붙여 세상에 선보이는 중견 도예 작가다. 온돌 문화가 없어지는 게 못내 아쉬워 만들었다는 '지산식 아궁이 벽난로'도 눈길을 끈다.

그에게 불은 그저 가까이 하고 싶은 자연이며 여장을 풀고 쉬어갈 때 만나는 길동무 같은 것이다. 자신의 손끝과 시선에서 동양과 서양의 가장 오래되고, 그래서 불변이라 일컬어지는 사유의 두 이미지를 도자기와 결합시킴으로써 절대 진리의 세계와 교감하고 있다는 그.

40여년을 함께 했음에도 이제서야 도자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낀다는 그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랬듯 흙의 위대한 생명력을 은은한 정으로 대하고 싶다고 한다.

유난히도 남과 같아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천 점을 구워도 같은 것은 없다.

새로운 창조는 무(無)에서 시작된다. 無를 가지기 위해 오늘도 1천 300도의 장작불에 자신을 태워 없앤다는 부드러운 흙의 질감같은 사람.

지산은 지난 96년 8월 SBS 8·15 특집극 6부작 '왕도의 비밀' 촬영시 고구려 토기 가마를 제작·시연했으며 97년 7월에는 한국토지공사 소유 토지박물관에 선사시대 (신석기, 청동기) 유물도 제작했다. 2004년 5월~10월 까지 KBS 세계문명 도자 다큐(6부작) 제작시 한국, 중국, 이집트 도자기 제작 실연 흔적이 지산도천방에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원시토기와 같은 빛을 발하는 작품과 화려한 빛깔의 진사(辰沙)작품들은 대추나무에 매달린 대추처럼 옥색과 자주색의 대비가 불의 힘에 의해 환상적으로 빛난다.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러시아 페테르부르그 국립민속박물관, 중국 항주 국립 다엽(茶葉)박물관 다(茶)도구가 소장돼 있기도 하다.

"내 작품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다 압니다."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평생 가져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자리를 옮겨 앉으면 반드시 기억해 둔다는 영혼이 맑은 작가, 지금도 영감이 떠오를때면 언제나 물레 앞에 앉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일본 콜렉터들이 주로 찾는다고 한다.

"도자기 보는 것을 사람보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합니다. 작품을 소장하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을 경험해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소중하게 다루는 예의도 필요하지요."

자신의 집 전시실에 놓인 대형 작품들을 보면서 작품의 외형이나 문양보다는 가슴 속 깊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그가 만든 달항아리는 모양도 느낌이 가지가지다. 맏며느리처럼 여유로움을 간직한 것, 완벽할 정도로 당당한 것, 막내딸처럼 새침하고 귀여운 것 등 각각의 개성과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달항아리는 해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에 공감돼 만든 '반가사유상'은 도자기가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틀을 깨고 서양의 대표 모티브까지 과감히 수용, 창작영역을 포괄적으로 넓혔다.

한국 도자사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작품유형이란 평가를 받는 '토흔', 형태와 분위기는 원시시대, 삼국시대 토기와 같다. 유약없이 투박하고 거친 표면, 불에 거칠게 그을린 듯 남아있는 어둡고 탁한 색감, 투박하고 둔중한 기형(器型) 속에서 오히려 신비감이 감돌고 사유의 세계를 생각케 만든다. 이는 지산 만이 일관되게 고집하는 장작가마 속에서만 잉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기형(器型) 외에 새로운 형태의 접시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때로는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쌍어문(雙魚紋)과 같은 전통적인 구상(具象)들도 표현하곤 한다. 거친 손끝, 손마디를 통해 접시작품에 한 점, 한 점 그림을 채워 넣으면 또 한 폭의 현대 지두화(指頭畵)가 탄생돼 접시의 예술성을 높여준다.

"도자기는 단순히 공간을 차지하는 말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또 다른 소우주입니다." 이쯤되면 도자기 작업은 그 누구도 섣불리 할 수없다. "속도감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더 이상 고전적 도자기 스토리에 귀기울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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