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영양 봉감마을

봉감모전오층석탑

봉감마을과 봉감모전 오층석탑이 있는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는 청송군 진보면과 연접하여 있으며 안동시의 임동면으로 넘어 가는 고개가 있다. 입암면 산해리 31번 국도에서 나와 소로를 따라 잠시 가면 작은 마을이 반기는데 그 마을이 봉감 마을이면 그 봉감마을 안길마저 끝나고 굽이진 길을 오른편으로 돌면 반변천 지류인 동산천을 낀 들판에는장중한 모전석탑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서 있다

봉감마을 문해 앞 냇가에 위치한 남경대 전경

▲ 봉감마을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봉감(鳳甘)마을은 청송군 진보면과 연접해 있으며 안동시 임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고 반변천과 동산천의 두 냇물이 합해서 호수같은 큰 내를 이루어 산속의 바다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산해리(山海里)라고 한다.

원래 봉감(鳳甘)이란 봉황새와 물을 상징하고 있으며 봉황새는 봉(鳳)은 수컷, 황(凰)은 암컷으로 상서롭고 아름다운 새로서 매우 아름답고 의미 있는 노래를 불렀고 인간 음악에 대한 뛰어난 감상력을 지녔다고해 성군의 덕치(德治)를 상징하는 의미로 가무에 이용한다고 전해 지고있다.

봉감모전석탑 사리를 보관하던 석함

이와 같이 봉황이 물을 먹으로 오는 곳 즉 봉황이 먹는 맑은 물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봉황새가 나타나면 아주 큰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중국에 주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아버지 묘에서 봉황새가 나타났다고 하며 이후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전설도 있으며,이 마을에는 남경대(南景臺)와 국보인 봉감모전오층석탑이 있고, 봉감서원터와 봉감사절터가 있기도 하다.

▲ 국보 제 187호 봉감모전오층석탑

이 탐은 통일신라 초기의 모전석탑으로 입암면 산해 2리 서쪽 강가의 밭 가운데 세워져 있으며, 안정감 있고 위풍이 당당하다고 평가 받고 있다.

전체 탑높이 약 9m, 초층(初層) 탑신(塔身) 폭 3.34m, 높이 2.04m로 이 마을을 '봉감(鳳甘)'이라고도 부르는 데서 '봉감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변에 기와 조각과 청자 조각 따위가 흩어진 것으로 보아 절터였으리라고 짐작된며, 탑의 뒤편이 금당(金堂)자리였다 하므로 남향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멀리 병풍처럼 두른 산세와 탑 옆으로 난길을 따라 가면 만나게 되는 태극처럼 휘어진 동산천 줄기가 만드는 풍광을 보면 왜 이런 산 깊은 곳에 이토록 공들여 탑을 쌓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1930년대 유광교일이 현지답사하여 조선총독부에 처음 보고되고 1943년 빈산신삼이 편간한 '조선의 석탑'에 소개되어 학계에 알려졌으며, 목탑, 전탑, 석탑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목탑번안(木塔飜案)의 대표적인 작품임을 보여준 희귀한 자료이다.

탑에 대한 유래와 전설은 알려지지 않으나 탑이 있고 소지명으로 불러 내려온 것을 볼 때 폐사된 사명이 봉감사가 아닌가 생각되며 1977년 8월 22일 국보 제 187호로 지정되었다.

탑은 터를 고른 위에 흙과 돌을 혼용하여 지표면을 정리하고 그 위에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단부를 만들었으며, 기단은 단층기단으로 10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쌓았는데 모두 어느 정도 다듬은 흔적을 보이고 있고 그 위에 다시 낮은 2단의 괴임을 쌓아서 탑신부를 바치고 있다.

전형적인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단의 기단(基壇)은 편평한 자연석을 썼고, 한 변의 길이가 약 5m인 네모난 개석(蓋石) 위에 높이 41cm의 대석(臺石)이 있고 2단의 탑신(塔身) 받침이 구성되었으며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다.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도 모두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았다. 1층 탑신에는 섬세하게 조각한 문주(門柱)와 미석(眉石)이 있는 감실(龕室)을 두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중간마다 돌을 내밀어 띠를 이룬 것이 특이하다. 옥개석은 아래위의 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었으며, 처마의 너비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다.

한변이 약 5m의 2층 기단위에 축조되었고 1층 기단 폭이 3.34m 높이 2,30m며,수성암을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한 5층 모전석탑으로 전체 높이 11.30미터로 1층 탑신 남면 하단부에 화강암으로 섬세하게조각한 문주와 미석이 있는 불감을 조성하여 부처를 모셨으나 현재 부처는 분실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모전 석재로 1층 몸돌 받침을 두단 쌓고 그 위에 5층을 올렸는데 상륜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전체 높이는 11.30m며, 탑신은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수성암을 쌓았는데 두툼하게 잘라 잘 다듬었지만 크기는 그다지 고르지 않은편이며 단단한 석질은 아니다.

1층 탑신 18단 높이 2.30m, 너비3.26m, 남쪽에 감실 높이 1.10m, 폭1.10m, 깊이 1,06m 화강암으로 부처를 모셨는 듯하며, 2층 이상은 층마다 중간 부분에 턱을 두었고 아래 위를 서로 다르게 쌓은 방식이 특별하다.

지붕은 1층의 받침 수가 8단 위로 올라 갈수록 한단씩 줄고 처마 너비도 점점 좁아 지는데 고른 체감률로 균형 잡혀 보입며, 또 각층이 아래쪽은 넓은 반면 위쪽은 좁아져서 몸체 자체에서도 체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정연하고도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탑으로, 국보 제30호인 분황사 석탑과 함께 신라시대의 모전석탑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탑이다.

1990년도 해체·복원시 주변에서 상륜부 목심주초석(木心柱礎石)과 탑 안에서도 사리구를 보관하던 석함 일부가 발견되어 과거 어느 땐가 해체 또는 붕괴되어 수리할 때 안에 있던 사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깨진 사리구 석함을 탐 안에 체우는 돌로 이용한것 같다.

초증 탑신은 높은 편이나 폭이 넓어서 안정감이 있으며, 각 층의 체감률은 크지만 전체적 균형은 잘 이루어져 있지만 현재 5층까지만 남아 있다. 탑 전체의 높이가 11.3m이고 기단 폭은 3.34m이다.

▲산해리 봉감마을 인근에 있는 유적

남경대(南景臺)는 문해(汶海) 앞 냇가에 있는데,높이 20미터가 되며 그 아래 소(沼)가 있다.

1615년(광해군 7) 장곡 권태일(藏谷權泰一)이 지지하여 용담 권지(龍潭權誌)가 세웠다. 산수의 풍경이 아름답다하여 지금의 이름을 짓고 경상북도 영양군 진보현 문해리(文海里)에 시거(始居)하으며, 1684년(숙종 10) 권태시(權泰時)가 다시 중건하고 경치가 주역의 41괘인 산택손괘(山澤損卦)와 같다고 하여 산택재(山澤齎)라 게판(揭板)했다. 후에 관리가 소홀하여 없애려 하였으나 1827년(순조 27) 영남사림에서 남경대 중건계가 조직되었다. 1927년 정건모(鄭建模) 등 5명이 주도하여 봉람서원(鳳覽書院)의 목재로 재건하였다가 1993년 훼철되면서 영모당(永募堂), 산택재(山澤齎) 등의 편액과 기문기판(記文時板)이 철거되었다.

송간공(松澗公) 이정회(李廷檜) 선생이 약 500년 전에 이 곳에 서원을 창건하여 옥동서원(玉洞書院)이라 하였으나 그 후 봉람서원이라 개칭되었다. 지금은 봉람서원이 소실되고 논으로 되었는데 그 주춧돌과 기왓장만이 이따금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봉감사(鳳甘寺) 터는 봉감마을 영등산(嶺登山)의 굴 아래에 있었으며, 한 때 절이 번창했으나 한 스님이 사월 초팔일에 개를 잡아 먹은 죄업으로 말미암아 금강산에 있던 스님이 앞산에 혈(穴)을 자르고 뒷산을 칼로 찔러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여 이절을 물에 떠 내려 가게 해서 지금은 절의 터만 남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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