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넘어 히말라야로 (9)

8천m급 봉우리 중 유일하게 중국 국경안에 위치한 시샤팡마. 산명은 티베트어로 '황량한 땅', 즉 기후가 나빠 작물과 가축이 살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티베트에서 일정이 끝나는 내일은 8천m급 산 중 유일하게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한 시샤팡마(8천27m) 베이스캠프에 갔다 네팔과의 티베트의 국경 도시인 장무로 간다.

지저분한 숙소였지만 고단한 잠에서 깬 이른 새벽에 마지막 목적지인 시샤팡마(8천27m)를 가기 위해 서둘렀다. 우정공로는 전체가 공사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도로가 포장되면 인도 혹은 네팔로 이어지는 철도 공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2003년, 미 금융투자 골드만삭스는 '21세기는 2000년대를 전후해 초고속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와 중국 등 신흥경제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배경이 유행어가 된 브릭스(BRICS)다. 이 네 나라 가운데 중심국가로 중국과 인도 두 나라를 꼽았다. 이 둘 국가에는 '친디아'(CHINDIA)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그래서 이곳 철도 공사는 필연적으로 보였다. 세계 인구 제1위와 제 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세계 인구의 약 40%(23억명)를 차지하는 두 나라의 협력은 세계 정치·경제에 혁신적 변수로 작용할 것아 틀림없다.

라룽라 고개의 타르쵸와 룽다.

우리가 잠을 잔 팅그리와 달리고 있는 우정공로도 해발 4천m가 넘는 평탄한 고원이니 철도공사는 용이할 것 같다. 5천m가 넘는 몇 개의 고개와 협곡이 큰 장애로 나타나겠지만 칭짱공로를 만든 중국이 아니었던가. 비포장 길을 한참 달리니, 마지막 고개 라룽라(5천200m)를 앞에 두고 시샤팡마로 가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곧바로 가면 네팔 국경을 만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야 시샤팡마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것이다.

초원길은 좋았다. 티베트 운전사에게 핸들을 잠깐 넘겨 받아 운전을 했다. 대평원 끝에는 시샤팡마 봉만 하얗게 빛나고 사람도 인가도 동물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투명하고 고혹적인 색감을 보여주었다. 두 시간여를 달린 끝에 시샤팡마 입장을 통제하는 검문소를 만났다. 차량과 사람 입장료는 초모랑마와 같았다. 돈을 받고 영수증을 주는 티베트인 잘라 장부(34)는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2001년 포스코 팀과 함께 쿡으로 동참하여 등반을 했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후배 이인 대장을 기억해 냈고 김치를 담글 줄 안다며 밝게 웃는다.

검문소에서 만난 티베트인 잘라 장부와 함께한 필자(오른쪽).

비포장 길을 속도내어 달리다 보니 멀리 민둥산 아래 티베트 마을이 보였다. 양떼와 야크들도 다시 나타났다. 그러고 보면 중국화가 된 건 도로라는 선과 전기가 들어오는 곳에 국한된 일일 수도 있겠다. 이 넓고 넓은 티베트 고원 곳곳에 문명과 동 떨어져 사는 유목민들이 존재한다는 걸 보면서 든 생각이다.

8천m급 산은 그 자체가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샘물 같은 소중한 자원이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할 때 제일 탐낸 것이 바로 시샤팡마였다고 한다.

시샤팡마는 히말라야의 8천m급 14좌 중에서 가장 낮은 산으로 동쪽으로 순코시(Sunkosi) 강과 서족으로 트리술리(Trisuli) 강을 끼고 있는 랑탕-쥬갈 지역의 최고봉이다.

이 산은 8천m급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한 관계로 14좌 중 가장 늦은 1964년에야 허륭 대장이 이끄는 중국 원정대에 의해 초등이 된 산이다. 산명은 티베트어로 '황량한 땅' 즉, 기후가 나빠 작물과 가축이 살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산을 네팔에서는 '고사인탄'(Gosainthan)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50여㎞ 떨어진 힌두 성지 '코사인쿤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사인쿤드는 힌두어로 '성자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시샤팡마는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서는 서쪽으로 무려 420㎞나 떨어진 반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북동쪽으로 불과 85㎞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중국은 대륙의 공산화 성공 후 최후의 8천m급 산을 처음 등정하기 위해 1961년부터 3회에 걸친 정찰로 현재의 주 접근로인 북면 야북캉갈라 빙하를 통해 7천160m 까지 도달한 후 1964년 왕부주 등 10명의 중국 산악인을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정식 명칭은 티베트어로 '일기변화가 극심한 산'을 의미하는 '시샤팡마'(Shisha Pangma)로 통일, 사용하게 된다. 1979년 중국이 외국 등반대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10년 이상 발길이 끊겼던 이 산은 개방 이래 현재까지 남북, 북벽, 서릉 등지에 6개의 새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베이스캠프에는'시샤팡마 대 본영'이라는 표지석이 있었고 공중 화장실 한 채가 돌로 지어져 있다. 곁에 물이 흐르고 잔디가 고운 것이 베이스캠프 자리로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등반 대원들이 길라잡이로 쌓아 놓은 캐른 곁에 앉았다. 잉크 색 하늘에 우뚝 솟은 시샤팡마 정상을 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시샤팡마 봉으로부터 불어 왔다.

뭔지 모를 충만감으로 온몸의 세포가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발걸음이 바람에 나부끼듯 가볍다. 내 안에 영성이 충만해져 티베트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만트라'를 생각한다. 만트라는 모든 경전의 말들을 가장 짧은 언어로 줄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입안에서 웅얼웅얼 뜻 모를 나만의 만트라를 반복했다. 하늘과 초원, 시냇물, 양떼들의 색의 조화로 내 고독의 원천이 이곳에 있는 듯 광활한 자유는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덧없는 삶에의 유혹을 벗어나라. 자만심으로부터, 무지로부터, 어리석음의 광기로부터 속박을 끊을 때, 그대는 비로소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리라" 일찍이 탄트라 불교의 이념을 티베트인에게 전한'파드마 삼바바'가 한 말이 가슴에 전해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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