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영양 대천리 마을과 함양오씨

비파담 소.

영양읍에서 영덕군 영해면을 잇는 918호 지방도를 타고 가다 보면 대천리(大川里) 마을이 나오는데 흔히 한내(大川,旱川)라고 부른다.

이는 큰 냇물이란 뜻으로, 마을 앞에 큰 내가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인조조에 함양오씨 용계(龍溪) 오흡( 吳흡)이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한 뒤에 가뭄이 십여 년간 계속되어 강이 말랐던 것에서 연유하여 한천(旱川)이라고도 한다.

△대천리(大川里) 마을

문월당

영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대천리 마을은 골짜기가 많고, 들이 넓게 퍼져 있어 논농사를 주로 한다.

대천리의 상징은 비파담 소와 그 근처에 세워진 삼구정(三龜亭)이다.

비파담 소[沼]는 한내 서쪽에 있는 소로, 옛날에 어떤 미인이 이곳에서 비파를 타다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삼구정은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장자인 오흡이 세운 정자로, 소 아래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셋이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오극성 고택

대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선당동 , 문양동 , 고월동 , 옥산동의 일부를 가르고 합쳐 대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각각 자연 마을 단위로 이름과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고월(古月)은 고달골, 고드랫골이라고 불리며 지형이 반달 모양으로, 이곳에서 달맞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직곡(直谷)이라 하여 곧은 골짜기란 뜻으로도 불리었다.

문양(汶陽)은 시내의 북쪽[陽]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는 하는 것과 관련하여 마을의 자리가 주머니처럼 움푹 들어간 모습을 이르기도 한다.

삼구정.

구전(口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남루한 옷차림을 한 선비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가려고 하였으나 주위에 집에 한 채밖에 없어 가까이 가보니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주인 몰래 부엌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새벽녘에 주인이 나가 보니 나그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으니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방으로 모셨다고 전해지며, 그 나그네는 암행어사였다고 해 이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고 한다.

선당(仙塘),선댕이는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가 간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문양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옥산(玉山)은 마을 북쪽 산이름에서 유래되어 신선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고 하여 옥산이라 불렀다.

엄순봉 의사 생가지 표지석.

마을 입구에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옥선대(玉仙臺)라 하며,추수(秋水) 엄순봉(嚴舜奉, 1903~1938)이 태어난 마을로 그는 김좌진 장군을 도와 조국의 광복운동을 하였으며 조선인 아나키스트(arnachist,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였다.

△ 영양 삼구정(英陽 三龜亭)

1987년 12월 29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어 함양오씨 대천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당초 황간현감(黃澗縣監)을 지낸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맏아들인 용계(龍溪) 오흡(吳翕:1576∼1641)이 건립한 것이다. 처음에는 초가로 건립하였으나 그의 후손들이 개축하였다 한다.

오극성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왜란 때에는 선전관(宣傳官)으로 활약하고, 호란 전에는 훈련원 판관으로 있었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되자 이를 분하게 여겨 향리(鄕里)인 대천리 반월산(半月山) 아래에 초옥(草屋)을 세우고 은거하였다.

그 후 화재로 정자가 소실되자 맞은편 강둑에 다시 정자를 건축하여 만년을 보냈는데, 처음에는 모옥(茅屋)이던 것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후손이 개축하였다.

삼구정이라 함은 정자 앞에 세 개의 바위가 소반처럼 벌려 있어 정자를 업은 것 같은데, 그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9칸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건물로 후대에 다소 개조되었으나, 초익공(初翼工)의 조각수법과 중간문설주를 세웠던 문얼굴 등에서 품격을 엿볼 수 있는 마루방 상부가구(上部架構)의 장식적인 수법 등은 흔치 않은 예로 영양군 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이며 주변경관도 매우 아름답다.

△오극성 고택( 吳克成 古宅) 과 문월정(問月亭)

오극성 고택은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책록된 문월당 오극성이 낙향하여 건립한 가옥이다.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1760년경에 개수한 이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현재는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오극성은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며, 본관은 함양으로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報倭寇]"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걸어두고 늘 바라보며 병법과 무예를 익힌 후 1594년(선조27)에 병과에 급제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워 국란극복에 기여했고 이후에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600년(선조33)에 옥선대 아래로 낙향하여 문월당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정침은 7칸,측면 4칸 규모의 □자현 건물로, 평면은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진 사랑공간을, 우축에는 온돌방 1칸과 부엌, 고방을 두었는데 좌측의 사랑마루와 우측의 고방은 좌·우로 1칸씩 돌출되어 양날개집의 평면을 이루게 했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두었고,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으로는 가각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좌·우익사를 이루게 했으며,1760년경에 개수한 이후로 문화재관리를 위해 최근에 다시 보수해 빛바랜 고색의 모습은 덜하나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넉넉한 공간 배치가 돋보인다.

문월정은 영양읍 대천 1리에 있는 오극성의 선생의 정자로 30여년 전 문월당 종택 개축시 종택 뒷산 아래에 중건되었으며, 종택과는 남향으로 백 여 걸음 정도 떨어져 있고 정자아래에는 자손들이 화수촌을 이루고 있다.

△엄순봉(嚴舜奉 1903~1938)과 옥산(玉山)마을

호는 추수(秋水)요 별명은 형순(亨淳)으로 1903년 영양읍 한내 옥산리(玉山里)에서 출생했으며,농촌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나, 기백이 호협(豪俠)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재질이 출중하였다.

어릴 적에 만주로 옮겨서 거주했는데, 만주에서 우리 민족의 수난 당함과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치를 바라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김좌진(金佐鎭)장군의 휘하에 들어가서 청년층 막료(幕僚)의 한사람으로서 활약했다.

1933년 북만주(北滿洲)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 청년부장이 되었으며,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人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한 뒤 백정기(白貞基)·정화암(鄭華岩) 등과 상하이로 갔다. 1935년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있던 친일파 이영로(李榮魯)를 살해하고, 1936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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