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전탑의 고장 안동

보물 제57호로 지정돼 있는 조탑리 오층전탑. 안동의 전탑 중에서 가장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랜 불교문화 전통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는 1천500여 기의 옛 탑이 남아 있다. 그러나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塼塔)은 대부분 경북에 분포하며 특히 안동 지역에 집중돼 있다. 전탑은 왜 넓은 지역에 유행하지 못하고 안동 일부에만 남아 있는가. 재료의 획득이 여의치 않고 조탑이 까다롭다는 점, 쉽사리 붕괴될 수 있다는 점 등이 작용한 것일까.

전탑은 탑파 형식에서 목탑-전탑-석탑의 형식으로 발전하는 탑의 중간 형태로 본다. 중국은 전탑 형식이 발전했고 우리나라는 석탑, 일본은 목탑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경기도 여주와 안동에서만 볼 수 있다. 안동의 전탑은 철길의 진동을 묵묵히 받아내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우뚝 솟아있다.

조탑리 오층전탑의 인왕상이 앙증맞은 분위기로 답사객을 맞는다.

△전탑의 고장 안동

전탑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안동이 가진 다양한 문화 중 뚜렷한 하나의 자랑거리다. 안동의 전탑을 보려면 관문인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 부근의 일직 조탑동 오층 전탑부터의 답사가 일반적 순서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오층 전탑은 안동의 전탑 중에서도 가장 안정감 있는 규모와 비례를 보여주고 있으며 보물 제57호로 지정돼 있다.

남안동 나들목을 빠져 나오면 첫 번째 보이는 동네의 들판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답사객을 맞이한다. 스테디셀러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답사기에는 이 탑이 사과밭 가운데 있다고 씌어있지만 현재 사과밭은 없어지고 널찍한 들판이 사람을 맞는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감실 좌우에 인왕상이 돋을새김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암좌 위에 서 있는 인왕상은 무시무시하기는커녕 꿀밤도 한 대 먹이지 못할 것 같은 아기주먹을 갖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신세동 칠층전탑. 왼쪽으로 일제가 놓은 중앙선 철길 소음벽이 보인다.

주먹코에 왕방울 같은 눈, 불끈 쥔 주먹, 다리 근육이 돋보이지만 귀엽고 친근감을 주는 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탑은 왠지 쓸쓸함을 전해준다. 빈 들판에 홀로 놓인 자태가 차라리 과수원에 둘러싸여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이 탑이 쓸쓸한 것은 탑 자체를 제외하면 이곳을 절터로 추정할 만한 다른 유물이나 기록이 거의 없다는 데서도 비롯된다. 그래서 이 탑은 다른 탑들처럼 폐사지의 이름을 가진 게 아니라 동네 지명을 이름으로 해서 '조탑리 오층 전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런 사정은 안동의 다른 전탑들도 마찬가지다.

△신세동(법흥동) 칠층 전탑

조탑리를 나와 안동시내로 접어들어 안동댐 초입에는 '신세동 칠층 전탑'이 거대한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다. 일반적으로 석탑에 비해 남아 있는 수가 상당히 적은 전탑은 쉽게 붕괴될 수 있는 결점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신세동 7층 전탑은 모진 수난 속에서도 붕괴되지 않고 오랜 세월을 묵묵히 버티고 있어, 곧잘 안동인의 저력에 비유되곤 한다.

신세동 7층 전탑은 8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전탑이다. 현재의 지명은 법흥동이지만 국보로 지정될 당시의 동네의 행정지명이 신세동이어서 아직도 그 이름으로 불린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됐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속한 전탑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폐불, 억불정책에 따라 폐사가 된 것으로 전해지는 법흥사터에는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이 들어서 있다.

안동 역사서인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탑의 상륜부에는 금동장식이 있었지만 유실됐다. 이 장식은 임청각을 창건하면서 철거돼 그것을 녹여 객사에 사용하는 집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수모를 당한 탑은 이후 끊임없이 수난을 당했다.

일제는 탑과 지척, 아니 바로 코앞으로 중앙선 철길을 놓았다. 이는 대를 이어 걸출한 독립지사를 배출한 임청각 고성 이씨 집안의 내력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놓아 집안의 정기를 끊기 위함이었다. 이 덕분에 수천 년 자리를 지켜온 전탑은 기차의 소음과 진동에 시달리게 됐다. 또 철둑과 소음 차단벽이 가로막으면서 탑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도 시원스레 굽어볼 수도 없게 됐다.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 탑의 수난과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국보 중에서 이 탑만큼 시달림과 수모와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없다. 절은 양반이 빼앗아 갔고, 강변의 빼어난 경치는 철둑과 안동댐이 막아버렸는데 곱게 쌓은 기단부는 20세기 인간들이 시멘트를 거의 맹목적으로 처발라 볼썽사납기 그지없게 되었다."

△동부동 오층 전탑

안동역 소화물 관리소 바로 아래에 자리잡은 '동부동 오층 전탑'은 보물 56호로 지정돼 있다.

안동역 광장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이 유서 깊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을 만날 수 있다. 탑 주변은 담장과 수목들로 잘 가꿔져 있다. 그러나 역 앞을 지나는 차도나 인도에서는 탑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의외로 발길이 뜸하다.

탑 부근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이 탑이 자리한 곳을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 등이 기록하고 있는 법림사(法林寺) 터로 추정하고 있다. 법림사의 규모는 어마어마해서 비오는 날 법림사 처마를 따라가면 전혀 젖지 않고 안동 도심을 지날 수 있었다고 전해온다.

이 전탑 역시 기차역 부근이어서 신세동 전탑과 비슷한 운명을 감내하고 있다. 영가지 등에는 법림사 전탑이 7층이라고 기록하고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했다고 증명하고 있어서 현재의 5층 탑은 옛 모습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명나라 군인들이 금동제를 도둑질해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이래저래 안동의 탑들은 철마의 소음과 진동, 도둑질로 인한 피해, 후세 사람들의 관리소홀 등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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