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사랑이 손짓하는 바다…누가 저 사랑의 자물쇠를 열수 있을까?
포구와 하트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어 사랑의 자물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왼편 방파제 벽면에 멋들어진 흘림체로 쓰인 ‘물빛 사랑 마을’과 큐피드 화살이 있는 곳을 지날 땐 설레기조차 했다. 파동이 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자물쇠가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지점에 도착해 있다. 이 자물쇠는 누구도 함부로 열 수 없을 것 같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누굴까.
방파제 벽면에 신라 충신인 박제상(朴堤上)에 관한 일화가 짧게 언급되어 있다. 이곳이 왜 사랑이 이루어지는 바다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삼국시대 초기 신라는 국제무대에서 아주 힘이 약했다. 주변 국가에 많이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성왕 때는 내물왕의 왕자인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내야 했고 내물왕의 왕자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 뼈아픈 수모를 겪었다. 그로 인해 내물왕에 이어 왕 위에 오른 눌지왕은 늘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 마음을 아는 박제상이 복호를 구출해 온 뒤 다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그의 아내가 율포항으로 달려왔을 땐 이미 배는 항구를 뜨고 있었다.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아내의 피맺힌 절
사랑의 자물쇠는 부부의 애틋한 사랑과 재회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세워졌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는 광고 카피도 있지만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지 않을까. 예쁜 사랑을 꿈꾸는 커플들이 작은 자물쇠를 대롱대롱 걸어놓은 방파제 한쪽 테트라포드 위에는 낚싯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은 강태공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가 낚으려는 게 혹 사랑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길 따라 지난 시간의 흔적이 또렷하다. 신생대 말기 마그마의 분화 작용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당시의 이곳을 상상해 본다. 주상(柱狀)은 기둥을, 절리(節理)는 틈을 뜻한다.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으로 솟구치다가 찬 공기를 만나 수축하는 순간, 그 찰나에 육각 또는 오각형의 기둥 모양이 만들어졌다. 우리네 삶도 때때로 1천℃ 이상의 뜨거운 용암처럼 들끓었다가 빠르게 냉각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 삶의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의 모양과 틈을 가진 채 살아간다. 혹 아는가. 수백 년 뒤 미라로 발견되어 학계에 중요한 연구 자료로 쓰일지, 터무니없는 상상도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다시 길을 재촉한다.
흙길을 밟고 고불고불한 샛길을 지나자 길가에 봉분이 내려앉아 죽음조차 희미해진 무덤이 보인다. 들어가지 못하게 작은 푯말을 세우고 줄을 쳐 두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참 허술하다. 양지바른 곳의 야생화는 물이 올라 파릇하다. 긴 잠에서 깨어난 자연이 하품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 역시 봄 햇살을 받아 오후가 될수록 더 반짝인다. 이곳에도 강태공은 있다. 그들은 어떤 날씨 건 어느 시간 때든 바다와의 접속을 원하는 것 같다.
율포진리항에서 나아 해변까지(1.9㎞)는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파도 소리를 마음껏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이 구간 전체가 완만해서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객이 더러 눈에 띈다. 드디어 부채꼴 주상절리가 보이는 전망대 위에 선다. 주름치마니 꽃봉오리 같다느니 하는 표현이 다 맞는 것 같다. 아름답다, 신기하다, 도도하다, 뭐 이런 수식어들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천혜의 지질 박물관이라는 지칭이 과하지 않다. 최수종이 출연한 ‘대왕의 꿈’이 이곳에서 촬영된 후 더 많이 알려졌다. 하긴 2009년 이전에는 군사지역이라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다시 길 위에 선다. 해안을 따라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좁은 길, 언덕길, 야생화길, 나무 계단을 고루 걷고 나면 하룻밤 묵고 싶을 만큼 예쁜 펜션이 나온다. 오늘 바다는 하늘색과 같다. 무엇보다 순하다. 노송과 어우러진 푸름에 마음을 뺏기다 보면 읍천등대가 나온다. 아무런 치장 없는 그냥 하얀 등대다. 주변이 워낙 휑한 데다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딛고 저 혼자 멀찍이 떨어져 있어 퍽이나 머쓱해 보인다. 근처 해안엔 노동을 내려놓은 어선이 물결에 잠시 몸을 맡긴 채 서로의 어깨를 치며 햇빛바라기를 하고 있다. 이곳이 읍천 갤러리다. 담벼락마다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매화가 활짝 핀 집도 보이고 파도가 넘실대는 집도 지난다.
길가 나무 의자에 초로의 노인 두 분이 앉아 있다. 이곳에서 나아 해변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30분은 걸리는데 거 까지 뭐 할라꼬 가노. 여기가 좋제. 담비락마다 그림도 칠해있고.”
주름을 접으며 웃는다.
◇여행자을 위한 팁
△도보 : 율포진리항-양남주상절리-파도소리길-읍천항-나아해변(1.9㎞). 카페와 조망이 뛰어난 카페가 많고 길이 완만해 트레킹하기에 더없이 즐겁다. 문의·안내 : 경주시 해양수산과(054-779-6320).
△대중교통 : 경주시나 경주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에서→ 읍천항 파도소리길(06시30분 첫차, 150번 버스), 보문단지 경유(첫차 08시, 150-1번) 소요시간 : 1시간에서 1시간 10분(보문단지 경유 기준), 양남→경주 막차는 20시 50분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