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숲이 먼저 저물어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숲속에 있으면 저녁은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구멍을 뚫어놓는다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저 숲에 누군가 있다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저녁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대추야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감상] 생각지도 못하게 우리 반 아이들이 다음 주에 있을 연구학교 보고회 식전 공연을 맡게 되었다. 시 암송과 자작시 낭송이 공연이 될까. 내심 합창부나 가야금 동아리가 나서주길 바랐으나, 아이들의 시 낭송이 더 참신(?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은행잎을 떨어뜨린다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감상]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영일대 바닷가에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울려 퍼진다. 작년 시월 마지막 날도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누가 왔나 느끼는 건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전부 시시하게만 느껴져식탁보를 접으며 너는 말했다주말 오후 티브이에선 무엇이든 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방영되고그때마다 우리는 식탁보를 바꿨다고단한 한 주였어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단에서 두 번이나 굴렀지만도와주는 이 없이 무릎을 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식탁보의 양끝을 맞대었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다티브이 속 아이들은앞니가 빠진 얼굴로 엉성히 자신을 소개한 뒤에자랄 곳 없이 완벽한 음을 쌓아간다아이의 빛나는 결말이 그려지는오늘은 이렇게나 평범한데저애는 꼭 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잠자코 아이의 작은
어려서부터 나의 희망은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되는 것이었고그걸 잊은 적이 없습니다.나는 아직도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되지는 못했으나희망과 불화한 적은 없습니다.많은 세월이 지나나는 나의 희망에 지치기도 했지만희망은 남에게 줄 수도 없고버려도 누가 가져가지도 않습니다.시가 혼자인 것처럼희망은 늘 저 혼자입니다.[감상]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가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를 쓴 빅터
콩이 밭두둑 책상에 썼습니다.- 콩당콩당 알콩달콩 살자.밀이 밭고랑 의자에 썼습니다.- 밀치지 않겠습니다.사과나무가 하늘 우산에 썼습니다.- 너무 예뻐서 사과합니다.쑥이 낭떠러지 장화에 썼습니다.- 쑥스럽게 살겠습니다.달이 뭉게구름 시간표에 썼습니다.- 해보겠습니다.해가 노을 스케치북에 썼습니다.- 별 볼 일 있도록 사라지겠습니다.[감상] 학생들의 인성이나 진로 교육 때 국내외 유명인들의 좌우명을 살펴보고 ‘나만의 좌우명 찾기’를 한다. 동양의 좌우명은 ‘삼가하다’라는 의미가 강하고, 서양의 좌우명은 ‘성취하다’라는 의미가 많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걸을수록 나 자신과멀어지기 때문이다체중 조절, 심장 기능 강화,사색, 스트레스 해소 등등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걷기란 갖다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어제는 만 오천 보 정도 이동해서한강공원에 나를 유기했다누군가 목격하기 전에팔다리를 잘라서 땅에 묻고나머지는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졌다머리는 퐁당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지만집에 돌아오면 다시 붙어 있었고나는 잔소리에 시달려서 한숨도 못 잤다걷기란 나를 한 발짝씩떠밀고 들어가서 죽이는 것이다여럿이 함께 걸을 때도 있었다나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모두자신과 더 가까워지리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부싯돌 번쩍하듯 찰나에 사는 몸풍족하나 부족하나 그대로 즐겁거늘하하 크게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감상] 백거이의 시((對酒·二)를 읽고 ‘칼 세이건’과 ‘캔디’, ‘니체’가 떠올랐다. 칼 세이건은 보이저호가 명왕성 부근에서 찍은 사진 ‘창백한 푸른 점’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중략)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
크로아티아의 수도자그레브에는가스등에 불을 켜고 끄는 직업이 있다지.2인 1조로오래된 도시 구석구석을 돌면서긴 막대기로가스등 하나하나 직접 불을 밝히고 끄는사람들이 있다지.“커서 뭐 될래?”의사 판사 변호사 교사처럼몇 글자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설명하려면긴설명하려면시간이 필요한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최소한‘긴 막대기로 가스등 하나하나에 직접 불을 밝히고 끄는’보다는긴.[감상] 출근할 때는 KBS 클래식FM ‘출발 FM과 함께’를 듣고, 밤에는 EBS ‘세계테마여행’을 보는데, 두 방송 모두 글감을 자주 던져주는(?) 유익한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감상] 백두대간수목원을 다 둘러보려면 얼추 3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봄, 가을 트래킹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매년 ‘봉자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봉자’래서 트로트 가수가 오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봉화 자생꽃 페스티벌’의 약자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트램 일행들이 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동물원에 갔다호랑이를 보러 갔다호랑이가 어흥 할 때까지 기다렸다한참을 기다려도 호랑이는 하품만 했다시시해서 돌아서는데갑자기거쿠와어루황~ 하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바지에 오줌을 쌌다망할 놈의 호랑이 어흥 하고 울 줄 알았더니순 엉터리로 울어서 진짜 놀랐다[감상] 지난 주말,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다녀왔다. 아시아 최대규모이고 세계에서는 두 번째라고 한다. 특히, 시드 볼트(종자 저장소)는 전 세계에 단 두 곳뿐인데, 노르웨이 스발바르(식용식물 종자)와 대한민국 국립백두대간수목원(야생식물 종자)이 그곳이다.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며 호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했던 말을 또 했어채찍질채찍질꿈쩍 않는 말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니체는 울었어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두 개의 혓바닥하나는 울며하나는 내리치며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안을까 봐안길까 봐했던 말을 또 했어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정확한 죽음은불가능한 선물 같았어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잘못했어잘못했어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감상]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을 읽다가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
가을 햇볕에 공기에익는 벼에눈부신 것 천지인데,그런데,아, 들판이 적막하다―메뚜기가 없다!오 이 불길한 고요―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으니……[감상]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성서(聖書)에는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Homo’(호모)는 살아 있는 흙을 뜻하는 ‘Humus’(후무스)에서 나왔다. 우리는 모두 흙에서 태어나 흙 위에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무분별한 농약(農藥)의 남용으로 지구 전체 토양의 3분의 1이 훼손되고
나는 끼워 맞추는 도형입니다장래의 모양을 바꾸고상사 비위를 맞추거나 자세를 낮춰 어떻게든같은 형태를 이뤄야 합니다한 덩어리가 되기 위해선 빌붙어 살아야 하지만그게 삶이라고,서로 다른 자음과 모음이 만나차곡차곡 쌓여 더불어 한 글자가 됩니다나를 받아준 자리는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틈바구니살길을 찾아이 땅의 틈을 메우고 방 한 칸에 세 들어 사는 나는웅크리고 엎드리거나 모로 혹은일자로 눕다가 앉은 채로 꿈을 꿉니다학습된 몸부림,성 바실리 성당은 멀고지나간 자세들이 하루를 세워 벽을 만들기 전이젠 줄어들어야 할 때슬픈 곡조의 트로이카를 들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 봐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저리도 눈부신가요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향기 같은 것인가요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 봐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감상]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란 문학으로 인간의 몸과 마
과일농사 짓는 삼촌에게사과나무가 일을 시킨다.-봉지 씌워-겉봉지 벗겨-속봉지 벗겨-이제 따서 담아사과나무 심부름하느라이 가을 삼촌 얼굴도발갛게 익었다.[감상] 경북 청송을 상징하는 꽃은 ‘사과꽃’이다. 5월에 만개하여 청송군 전역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청송은 예로부터 야생의 산사과 나무가 많기로 유명했다. 청송군의 캐릭터도 ‘청이’와 ‘송이’다. 붉고 노란 청송 사과를 상징한다고 한다. 주말 주왕산 등산을 갔다가 청송 사과를 사려고 매장에 들렀다. “이 가격 실화냐?”라는 말로 절로 나왔다. ‘금과일’, ‘금사과’가 되었다. 점원은
콘돔을 대신할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 반대로 무산되었다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 놓고 보니삼가 존경심마저 든다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버,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사,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감상] ‘골짜기’와 ‘까마귀’라는 시어 때문에 스산하고 어두운 정서가 느껴지지만, 시인은 까마귀를 “모든 빛깔을 억누른 검은 빛깔로 저 자신을 두르고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거친 소리로 울고 가는 광야의 시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감상] 1994년 12월에 발매된 가수 윤도현의 솔로 데뷔 앨범에는 명곡이 많다. 윤도현이 어린 시절 작곡한 노래이자 타이틀 곡인 ‘타잔’, 대학 시절 노래방에 무한 반복되었던 ‘사랑 tw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