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서비스

[서원] 17. 영덕 병곡면 운산서원
[서원] 17. 영덕 병곡면 운산서원
  • 최길동 기자
  • 승인 2018년 12월 19일 21시 45분
  • 지면게재일 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 1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라를 바로세우려 헌신한 고려말 충신의 정신 깃든 곳
운산서원 전경
경북 영덕군 병곡면 원황길 110-14 (원황리 944)에 있는 운산서원은 원황마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려 공민왕(1351∼1374년) 때 충신이자 성리학자, 문장가, 신진개혁파로 이름난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와 8대 손인 성헌(惺軒) 백현룡(白見龍)을 배향하고 있다.

운산서원현판
원황마을은 고려 말 14세기경부터 주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마을 이름은 마을이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영해부(寧海府)에서 보면 누렇게 보인다는 뜻의 원황(遠黃)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하며, 이곳에 자리한 서원의 운산은 승운산(勝雲山) 혹은 등운산(騰雲山)이라 불리는 칠보산(七寶山)이 있어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운산서원 전경
서원은 1812년(순조 12년)에 영덕·영해 지방의 유림들이 논의 주창하여 옛 람정승(攬勝亭)터에 건축하였는데 그 당시 규모는 경덕묘 3칸, 입도문 3칸, 동재 직방재 3칸, 서재 박약재 3칸, 문루 6칸, 장경각 2칸, 행랑주사 12칸 등 규모가 큰 서원이었으나 현재는 강당만이 남아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죽근으로 쓴 친필 운산서당 현판
서원 사주문을 지나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운산서당 현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원에 사당 현판도 있는 이유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899년(광무 3)에 백순지 등이 재건하여 1950년대까지 근대교육 장소로 활용된 건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6월에 운산서원 강당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5호 지정되었다.

운산서원 배면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2통 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는 중당협실형이고 전면에 퇴칸을 두고 헌함을 설치하였다. 또한 강당 전면 대청 전면에 원기둥 3본, 배면 가운데 기둥 1본 원기둥을 세워 격을 높였으며,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제형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 백문보 행적

백문보(白文寶·1303∼1374년)는 고려 말 명신, 자는 화보(和父) 호는 담암(淡庵) 또는 동재(動齋), 당호는 보인당(輔仁堂),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보인당현판
선생은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춘추관 검열을 거쳐 중서문하성 우상시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때는 인재를 뽑아 쓰는 전리판서 되어 무신 집권 이후 인재 등용 제도가 무너졌으며, 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인재 등용의 길이 더욱 문란해져 이를 바로 잡고자 과거를 십과(十科)로 분리해 실시하여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인물을 뽑고, 또한 중요 정책의 결정에 참여하는 관원은 반드시 과거를 통해 뽑은 인재를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청은 모두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전리판서로 있는 동안 고려 조정의 인사는 상당히 혁신될 수 있었다.

또한 공민왕은 그와 의견이 다르지만 그의 인품이 공명정대하고 충신이었기 때문에 정사를 맡겼으며 홍건적의 난을 수습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 고려를 재건하기 위해 환안도감(還安都監)이라는 관청을 신설하고 그 중책을 선생에게 맡겼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전쟁으로 소실된 전적들을 복구하면서 불교식으로 된 의식과 제도를 유교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그가 과감한 개혁을 통해 고려를 새롭게 하고자 한 인물로 후대에 평가를 받았다.

1363년(공민왕 12)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8월 경연에 나아가 종일토록 공민왕을 모시고 이제현, 이능간, 허백 등 15인이 강론을 하였는데 특진으로 관료직의 가장 청직인 광정대부 정당문학(匡靖大夫 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이제현과 이곡, 이색이 불교에 대하여 관대한 반면 백문보는 인사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최해의 척불론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로 인해 정당문학 이상의 관료로 승진을 못한 이유로 볼 수 있다.

1369년 고려의 국운을 예견한 듯 충청도 직산의 토지를 정리하고 경상도 영해부(현 영덕군 영해면)으로 낙향하였으며 여러 자식에게 관직에 나가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1373년(공민왕 22) 세자 우(禑)의 스승으로 전녹생, 정추와 함께 임명되었으며, 1374년 12월 향년 72세로 졸하니 우왕이 부음을 듣고 심히 슬퍼하여 예관을 보내 조문하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내렸다.

충간공 담암 백문보 상향 축문에는 ‘斥邪衛道 納約匡君 屹爲砥柱 起我後人’,‘사도를 멀리하고 정도를 보호하며, 군주을 바르게 인도하고, 주초를 확고히 세워, 후세 사람을 일깨우라’기록돼 있다.

운산서원강당
백현룡(白見龍, 1543∼1622년)은 조선 중기 학자, 자는 문서(文瑞) 호는 성헌(惺軒)이다. 진사를 지낸 백미량(白眉良)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 1)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였고 일찍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그는 해마다 도산서원의 농운정사(?雲精舍)와 청량산사(淸凉山寺)에 와서 묵으면서 『대학(大學)』,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을 읽으며 퇴계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휘하에서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온 전력을 다하였으며, 1609년(광해 1)에 식년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에 올랐으나, 더 이상 과거와 벼슬에 대한 뜻을 갖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자연을 벗하여 오직 학문에만 마음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운산서원은 1812년 건립된 후 지금까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능과 백문보, 백현룡을 제향하는 유교 공간으로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되었으며, 현재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최길동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최길동 기자
최길동 기자 kdchoi@kyongbuk.com

영덕 담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