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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33. 안동 고산서원
[서원] 33. 안동 고산서원
  • 오종명 기자
  • 승인 2019년 04월 10일 21시 51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4월 11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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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학문에 매진 퇴계학맥 꽃피운 '영남의 소퇴계' 참된 선비의 기상 가득
고산서원은 1789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대산 이상정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고산서원은 조선 후기 유학자인 이상정(1710~178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암산유원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서원은 1768년(영조44) 대산 이상정 선생이 고산정사를 창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을 한 터전에 선생이 돌아가신 후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대산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고산서원 편액
이후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그 이후에는 향사만 지내왔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 묘우인 경행사, 동재를 중수했다. 1985년부터 유림의 공의로 이상정의 아우인 이광정(李光靖)을 배향했다. 이후,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5년 10월 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됐다.

사당인 경행사와 강당인 호인당이 전학후묘의 법식에 따라 배치했다. 우측으로 ‘ㅁ’자형 관리사가 자리하고 있고 전면 좌측에는 고산정사가 있어 도산서원의 역락서재를 연상하게 한다.
고산정사
고산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정자건물로 따로 담장이 구획되어 있어 서원에서는 바로 진입이 되지 않는다. 좌우에 방을 배치하고 가운데는 한칸 크기의 마루를 깔아 좌우대칭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팔작기와집으로 정면에 출입을 위한 일각문이 작게 서 있다. 풍광이 수려한 전망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사우인 경행사 내부에는 대산 이선생의 위패가 왼쪽에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 소산 이광정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산서원 내부 전경
△대산 이상정과 소산 이광정 배향.

대산 이상정(1711-1781)은 한평생 오직 학문으로 나아간 인물이다. 흔히 대산 이상정을 퇴계 학맥을 이은 대학자라고 부른다. 그의 별칭이 ‘소퇴계’인 것을 보면 일찍이 그의 학문은 근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앙에까지 두루 미치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퇴계 학맥의 연원과 정맥을 이어받아 꽃피운 것에 비해 인식은 상당히 저평가되어 있다는 것에 아쉬움을 남긴다. 영남학맥에서 대산만큼 학문이 깊은 사람도 드물었다.

그의 제자 인명록인 ‘고산급문록’에 올려 있는 문하생만 273명에 이른다. 안동 일직 망호리 출신의 이상정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목은 이색의 15대 후손이다.

대산은 당시 영남 남인 학계의 거두 밀암 이재의 외손자로서 문명이 높았으며 밀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특히 퇴계 이황을 시작으로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도학의 적전을 계승한 대학자이다. 대산을 지칭할 때 ‘소퇴계(小退溪)’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산 이상정이 남긴 저술만 보더라도 그의 학문적 깊이를 알 수 있다. 대산의 일차 저작물이라 할 수 있는 문집이 27책 분량. 거개가 두세 책 정도 남긴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성취다. 52권 27책에 모두 2천157판에 달하는 양이다.

25세에 대과에 합격한 대산은 여러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인 소호리 마을 뒷산 대석산 기슭에 ‘대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이때 부터 대산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실제 대산의 관직생활은 급제 이후 45년 동안 6년 정도에 불과했다. 대산의 문하에는 ‘호문삼종’으로 불리던 동암 류장원, 후산 이종수, 천사 김종덕 등 뛰어난 학자들이 줄줄이 배출됐다.

그의 학문 여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계기는 57세 때(영조43) 고산정사를 지은 것이다. 안동시 일직면 광음리에 위치한 정사 앞으로는 붉은 석벽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그 사이로 ‘미천’이란 시냇물이 흘러간다. 그는 이 풍광을 고산잡영(高山雜詠)으로 노래했다.

대산은 70세(정조4)에 이르러 정3품 당상관인 예조참의가 되었고 세상을 떠난 해인 3월에는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했다. 그해 6월 ‘9조소’를 올린 뒤 12월 9일 세상을 하직했다.

세상을 떠나면서 올린 9조소에는 대산의 평생 학문이 이 한 편의 글에 응축돼 있다.

입지(立志), 이치를 밝히는 일(明理), 거경(居敬), 하늘을 본받기(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기(納諫), 학교를 일으키기(興學), 사람 부리기(用人), 백성 사랑하기(愛民), 검소하기(尙儉) 9조소의 항목이다. 대산은 이 9개 항목이 모두 덕을 연마하고 본심을 기르는 요점이고 정치를 잘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정조는 “좌우명으로 바꾸어놓고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겠다”고 다짐하고 대산을 크게 등용할 의사를 가졌으나, 이미 대산이 세상을 뜬 후였다.

대산은 사후 35년이 흐른 순조 16년에 이르러 이조참판 직에 증직되었고, 또 이후 67년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됐다. 또 그 28년 뒤에야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호를 받은 해는 순조 4년(1910)의 일로 조선 왕조가 그 종막을 고할 때였다.

이상정의 아우인 이광정(1714~1789)은 자는 휴문(休文)이고, 호는 소산(小山)이다. 15세 때부터 외조 밀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735년(영조 11)에 증광향시, 16년에 동당향시에 합격했으나 전시에 불리하여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 뒤 영조 29년 어사가 영남인재 세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고, 1783년(정조 7) 국왕이 “이상정의 아우 광정이 학문과 행검으로 도내에 알려져 그 형의 풍도를 지녔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고 하여 이조에 명해 기용토록 분부했다. 온릉참봉, 동문교관, 사과, 별제등 직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했다. 비범한 재질로 평생 학문과 행검에 힘을 쏟았다. 문집 13권 7 책이 있으며, 1985년에 유림의 발의로 고산서원에 배향하여 봉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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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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