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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37. 포항 입암서원
[서원] 37. 포항 입암서원
  • 손석호 기자
  • 승인 2019년 05월 08일 17시 42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5월 09일 목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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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을 학문에만 매진한 영남대표 성리학자 숨결 그윽
입암서원. 포항시
입암서원. 포항시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立巖書院)은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그의 네벗(立巖四友)인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윤암(綸庵) 손우남(孫宇男)·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경북서원지와 입암서원약설 등에 따르면 1657년(효종 8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여헌 장현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위패를 모셨다.

이어 1713년(숙종 29년)에는 권극립·정사진·손우남·정사상을 추향하게 됐다.

입암서원 현판. 1810년 영천 군수 오수엽이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이후 1907년(순종 원년) 산남의진 입암전투로 묘우 등이 소실됐다가 1913년에 강당이 복원되고, 1972년에 묘우도 복원됐다.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 하정(下丁)에 각처 유생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그 덕을 기리고 있다.

입암서원 일원 3만4160㎡은 1986년 12월 경상북도지방문화재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돼 있다.

입암서원의 부속건물 일제당과 선바위(입암) 전경.

서원 내의 여헌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됐었으나 2004년 태풍피해로 완전히 고사해 그 자리에 없으므로 2004년 기념물에서 해제됐다.

여헌과 관련한 유물로는 여헌 선생 영정(1633년 학사 김응조 선산부사 제작), 마상도(馬上刀·전장 185㎝), 지팡이(철쭉나무 151㎝), 좌장(坐杖·철쭉나무 77㎝) 등이 전한다. 2014년부터 이들 소장 유물 일체를 한국국학진흥원(안동)에 기탁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 영정 복사본을 모시고 있다.

◇ 제향인물

△장현광

1554년(명종 9년)∼1637년(인조 15년).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구미 인동(仁同).

1576년(선조 9년)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돼 예빈시참봉 등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부임했다가 사직을 청한 뒤 관찰사의 허가 없이 귀향해 직무유기로 의금부에 체포됐다.

1602년(선조 35년) 공조좌랑으로 부임, 주역 교정에 참가했으며 이후 사헌부지평·장령·집의·공조참의·대사헌·공조참판·지중추부사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624년(인조 년2) 이괄(李适)의 난 뒤 부름을 받아 왕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하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군을 일으켰으나, 다음 해 삼전도(三田渡)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기설(理氣設)에서는 독창적인‘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제창했다.

이와 기를 경(經·날실)· 위(緯·씨실) 등 베 짜는 실에 비유해 날실과 씨실이 별개가 아닌 상호 작용으로 베를 짜듯 도가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가운데 매우 이색적이고 독자적인 경향을 보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저서로는 여헌집, 속집, 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됐다.

△권극립

1558년(명종 13년)~1611년(광해군 3년). 자는 강재(强哉), 호는 동봉(東峯)이고 장현광과 종유(從遊)했다.

주세붕의 아들 박(博)에게 수학했다.

선조 10년 동당시에 합격 , 선조 17년 향시를 거쳐 선조 19년 동당시에 장원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집중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공적으로 선조 38년 선무원종 공신록에 제3등 의병장을 근거해 인조 3년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증직했다.

△정사상

1563년(명종 18년)~1623년(인조 1년), 자는 여섭(汝燮), 호는 우헌(愚軒),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여헌 장현광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우헌실기(愚軒實記)가 있다.

△손우남

1564년(명종 19년)~1623년(인조 1년). 자는 덕보(德補)·길보(吉補), 호는 윤암(綸庵)이다.

정평공 죽석 손홍양(孫洪亮)의 11대손이다.

1613년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지산(芝山) 조호익(趙好益)의 문인으로 제현(諸賢)들과 도의로서 사귀고 유교문화를 일으켰다.

스승인 조호익이 그를 좋은 친구로 대했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해 지효(至孝)로 조정에 추천되니 “나는 하늘을 속였다”며 탄식했다.

임진왜란을 당해 일제당을 구축하고, 여러 동지들과 작전 참모로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많은 공적을 세웠다.

△ 정사진

1567년(명종 22년)∼1616년(광해군 8년).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군섭(君燮), 호는 수암(守庵),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영천 출생으로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힘써, 학행으로 조정에 계문(啓聞)돼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의인왕후(懿仁王后)와 선조의 상 때는 친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이 행동했으며 나라에 상(喪)이 있을 때는 언제나 채식을 했다. 독실한 몸가짐으로 사람들이 그를 외경(畏敬)했다.

◇여헌(旅軒)과 입암사우(立巖四友)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봉은 기룡산(자양면)으로 피난했는데 이듬해 피난 적지가 아님을 판단하고 윤암과 함께 입암(현재 포항시 북구 죽장면)으로 들어와 터를 잡았다.

두 사람은 1596년 임진왜란 후반기에 청송에서 피난 중인 여헌을 찾아가 입암 승경(勝景·뛰어난 경치)을 말하며 한번 찾아주실 것을 권한바, 그해 여름 우헌과 수암 형제와 함께 입암을 찾아 왔다가 절경에 매료돼 같이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1597년 여헌은 가솔을 이끌고 입암에 들어와 네 벗과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입암의 경치를 감상했다. 그 후 사우의 요청에 따라 선바위(입암)을 중심으로 28개처에 이름을 써서 붙이니 비로소 바위와 물이 각각 이름을 얻게 돼 오늘날 ‘입암 28경’이라 일컫는다.
 

입암서원 건물 배치도

◇서원 구조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당, 3칸의 강당, 부속건물로 1600년에 설립된 일제당(日蹄堂·1907년 산남의진 당시 입암전투에서 일본군 방화로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 1604년에 설립된 만활당(萬活堂·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추정·여헌이 임진왜란 때 피난 와 살던 곳으로 84세에 이곳에서 고종했다) 등이 있다.

사당에는 장현광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권극립·정사상·손우남·정사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1810년 당시 영천 군수 오수엽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포항 죽장 입암서원 인근에는 이곳이 ‘산남의병 전투지’임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있다.
입암서원 경상북도 문화재 지정서.

 

동봉 권 선생 유허비.동봉 권극립은 영천에서 태어나 임진왜란때 난을 피해 입암에 들어와 절경에 매료되 정착했다. 임란후 여헌 선생과 제현들은 모두 떠나고 동봉 선생만 남아 세거 함으로서 이곳이 안동 권씨 후손들의 세거지가 됐다. 1998년 후손들이 입암서원 정원에 유허비를 제막했다.
올해 음력 2월 하정(양력 3월 31일) 포항 죽장 임암서원에서 향사를 앞두고 한 제관이 분정(역할 분담)을 살펴보고 있다.
올해 음력 2월 하정(양력 3월 31일) 포항 죽장 임암서원 향사에서 제관들이 묘우에 모셔진 여헌 선생 영정과 입암 4우의 위패를 향해 절을 하고 있다.
올해 음력 2월 하정 입암서원에서 진행된 향사에서 여헌 장현광 선생 영정 앞에 제물이 차려져 있다. 선생의 영정 진품은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돼 있다.
일제당. 1600년 건립 됐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기와 지붕으로 절벽에 의지해 자연석 축대로 입암을 배경으로 건립됐다. 동방 우란재에는 장여헌 선생과 정우헌이 거처했으며, 서방 열송재에는 손우남 저수암이 거처음. 1907년 산남의진 입암전투에서 일본군 방화로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됐다.
일제당. 1600년 건립 됐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기와 지붕으로 절벽에 의지해 자연석 축대로 입암을 배경으로 건립됐다. 동방 우란재에는 장여헌 선생과 정우헌이 거처했으며, 서방 열송재에는 손우남 저수암이 거처음. 1907년 산남의진 입암전투에서 일본군 방화로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됐다.
어느 봄날의 일제당 전경. 1600년 건립 됐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기와 지붕으로 절벽에 의지해 자연석 축대로 입암을 배경으로 건립됐다. 동방 우란재에는 장여헌 선생과 정우헌이 거처했으며, 서방 열송재에는 손우남 저수암이 거처음. 1907년 산남의진 입암전투에서 일본군 방화로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됐다.
일제당. 1600년 건립 됐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기와 지붕으로 절벽에 의지해 자연석 축대로 탁립암을 배경으로 건립됐다. 동방 우란재에는 장여헌 선생과 정우헌이 거처했으며, 서방 열송재에는 손우남 저수암이 거처음. 1907년 산남의진 입암전투에서 일본군 방화로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됐다.안동 권씨 복야공파 입암종회
일제당. 1600년 건립 됐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기와 지붕으로 절벽에 의지해 자연석 축대로 입암을 배경으로 건립됐다. 동방 우란재에는 장여헌 선생과 정우헌이 거처했으며, 서방 열송재에는 손우남 저수암이 거처음. 1907년 산남의진 입암전투에서 일본군 방화로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됐다.안동 권씨 복야공파 입암종회
포항 죽장 임암서원에 모셔진 여헌 장현광 초상 복사본. 진품은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지난 2014년 기탁보관되고 있다.
입암서원 강당.포항시
입암서원 부속건물인 만활당.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임진왜란때 피난와서 살던 곳이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 입암종회
입암서원 부속 건물 만활당.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임진왜란때 피난와서 살던 곳이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 입암종회
입암 서원 묘우. 1657년 임암서원과 함께 창건돼 1907년 산남의진 의병 봉기 시 일경에 의해 소실됐다. 1972년 현재 건물로 복원됐다. 묘우에는 장현관 선생을 주벽으로 입암 4우를 배향해 매년 음력 2월 하정에 각처 유생들이 모여 제향을 받들며 그 덕을 기리고 있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 입암종회
포항시 북구 죽장면 선바위(입암). 높이 20여m 둘레 10m 직립한 괴암. 임진왜란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깊숙한 골짜기에 이름없는 바위. 권동봉 손윤암 선생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들어와 거처함으로서 사람이 살게 됐다. 1597년 여헌이 입암이라 명명한 후 현재 지명이 돼 죽장면 입암리로 불리게 됐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 입암 종회.
동봉 권 선생 유허비.동봉 권극립은 영천에서 태어나 임진왜란때 난을 피해 입암에 들어와 절경에 매료되 정착했다. 임란후 여헌 선생과 제현들은 모두 떠나고 동봉 선생만 남아 세거 함으로서 이곳이 안동 권씨 후손들의 세거지가 됐다. 1998년 후손들이 입암서원 정원에 유허비를 제막했다안동 권씨 복야공파 입암종회
입암서원 입구 전경
입암서원 인근에 설치된 입암 28경 안내도. 여헌은 입암 사우의 요청으로 입암을 중심으로 28곳에 이름을 부쳤다.
입암서원 앞 소공원에 자리한 노계 박인노 시비. 노계 박인노(1561~1642) 선생은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로 문무를 갖춘 선비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중군해 공적을 남겼다. 노계는 여헌과 교분이 각별해 69세 때 여헌 선생을 찾아 입암에 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지은 시조 29곡이 노계문학 중 빼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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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호 기자 ssh@kyongbuk.com

포항 북구지역, 검찰, 법원 등 각급 기관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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