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44. 영천 귀천서원
[서원] 44. 영천 귀천서원
  • 권오석 기자
  • 승인 2019년 06월 19일 20시 57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6월 20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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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영웅'의 용맹한 기상·애국심 서려
귀천서원 전경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지방도 치산 관광길을 따라 팔공산 지맥의 치산계곡 쪽으로 가다 보면 치산 마을 맞은편 좌측 산허리에 있는 자그마한 서원이 바로 귀천서원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탈환 등 의병활동으로 1등 공신 반열에 오른 의병장 ‘충의공 권응수(權應銖) 장군’을 흠모한 후손들이 향사를 지낸 서원이다.

귀천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 영남 지역에서 큰 공을 세운 백운재(白雲齋) 권응수(1546~1608년) 장군과 임계(林溪) 조경온(曺景溫)을 배향한 서원으로 조선 1676년(숙종 2)에 창건돼 1685년(숙종 11)에 사액됐으며 일명 경덕사(敬德寺)라고도 한다. 1832년(순조 32) 문무를 함께 배향해서는 안 된다는 향중(鄕中) 공론에 따라 별도로 회계 서원을 만들어 조경온의 위폐를 옮겼다. 이후 의병장인 권응심(권응수 장군의 사촌 동생), 김응택 장군을 배향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3년 복설했다.

현재는 신녕면 화남리에 권응수 장군의 유물관을 짓고 뒤쪽에 경충사를 건립해 권응심과 함께 후손들이 음력 4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어 귀천서원은 향사의 기능을 상실했다.

지난 2006년 창립된 권응수 장군 기념사업회(회장 권혁택)는 충의공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춘·추계 연 2회 제향행사를 거행하고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愛蓮里)의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권응수 장군 영정
△연혁 및 활동

조선 중기의 무신인 권응수 장군은 본관이 안동,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 시호는 충의(忠毅)로 1546년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에서 태어났다. 1583년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을 모집해 영천성을 탈환했다. 이후에도 울산전투와 밀양성 전투, 황룡사전투, 달성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영천성 탈환전투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성곽을 공격해 점령한 최초의 전투로 일부 임진왜란 연구자들은 이 전투를 ‘임진왜란 지상전 최초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응수 장군을 포함한 영천복성 공신들은 업적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무공신녹권(宣武功臣錄券)’, ‘권응수 장군 영정’, ‘태평회맹도병풍(太平會盟圖屛風)’, 장검, 유지(有旨) 및 장군간찰(將軍簡札), 교지(敎旨), 유서(諭書) 등 권응수 장군 유물은 지난 1980년 8월 23일 보물 제668호로 지정돼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백운재충의공실기’의 연보에 의하면 귀천서원의 모체는 권응수가 1606년(선조 39) 신녕현 서쪽 귀수가의 지산에 건립한 서재인 ‘백운재’이다. 백운재는 건립 당시 강당이 4칸이고 좌우에 집, 요이 각 2칸씩 있었다. 권응수는 서적을 구매하고 집기를 갖추는 한편 전답과 노비를 획급해 서재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외에도 노숙한 유생을 맞이해 향리의 모든 자제들을 가르치며 그곳에서 강습하도록 했다.

19세기 초까지 ‘귀천서원’이라는 명칭은 통용되지 않았다. 명확한 것은 권응수를 제향하는 사당을 ‘경덕사’로 불렀으며 강당은 기존대로 ‘백운재’ 내지 ‘귀천정사’로 불렸다.

귀천서원이라는 명칭은 조용석(1705~1774)의 권충의공 영정 이봉 우귀천서원 시고유문과 귀천서원 권충의공 신도비 개기 고유문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외에는 1871년의 영남읍지에서 공식 명칭으로 확인된다.

권응수의 후손들은 1748년(영조 24) 이광정에게 행장을 받고 1758년(영조 34) 홍문관 및 예문관 대제학인 남유용에게 신도비명을 받아서 신도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또 이 해에 묘우를 중건하고 국왕이 하사한 영정을 가묘에서 옮겨와 봉안했다. 권응수는 임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서 ‘충의’의 시호를 받은 국내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귀천서원 강당 전경
△귀천서원 건축 특징

귀천서원은 조선 숙종(肅宗) 2년(1676)에 창건, 경내에는 강당과 사당, 내삼문, 신도비각과 신도비 등이 남아있는데 전면에 강당이 있고 뒤편에 사당이 배치돼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이다.
권응수 장군 신도비각 하마비
권응수 장군 신도비
서원은 북향의 강당 우측 전면에 신도비각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담장 밖 정면에 하마비가 있다. 사당인 경충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 위의 장식은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전면에 내삼문이 있고 주위는 토석 담장을 둘렀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며 가구는 5량 가로 기둥 위는 이익공으로 장식되어 있다. 평면은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한 칸씩의 온돌방을 둔 형식이다. 전면에 비해 배면은 낮게 조성되어 있으며 기단 전면에 자연석 디딤돌 2개소와 기단 상부에 디딤돌 2개소를 위치했다.

10개소의 초석은 자연석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초석 상부에 10개소의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10주 모두 원기둥으로 구성했으며 하부에서부터 하인방, 상인방, 창방 순으로 기둥에 결속했다.

전면 중앙 2칸의 화반은 파련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 퇴칸의 화반은 별도의 장식없이 사다리형으로 화반 상부 양측면에는 소로를 끼웠다.

대청 상부에는 연등천장으로 서까래가 노출되어 있으며 대청은 보방향으로 장귀틀, 도리방향으로 동귀틀을 결속해 동귀틀 사이에 청판을 끼웠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녀와 사래는 서까래의 굵기에 비해 다소 얇게 형성되어 있다. 강당의 전체적인 구성은 보편적인 서원 강당의 양식과는 다른 점들이 엿보이는데 측면 창방이 생략된 점, 대청 양 측면의 가구 구성방법, 3분변작법 등을 특이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귀천서원 사당 전경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 내삼문이 있고 주위는 토석 담장을 둘렀다. 가구 구성은 3량가로 내부는 통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량상부에 세장한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있다.

지붕은 서까래 상부에 부연을 덧달아낸 겹처마로 형성되어 있으며 맞배지붕 양 측면에는 박공과 풍판을 달고 상부에 목기연을 얹었다.

백운재 실기
권응수 장군 묘소
권응수 장군 영정이 모셔진 경충사에서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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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석 기자 osk@kyongbuk.com

영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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