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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50. 김천 자동서원
[서원] 50. 김천 자동서원
  • 박용기 기자
  • 승인 2019년 07월 31일 17시 23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8월 01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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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직언 마다하지 않은 대쪽같은 선비정신 오롯이
자동서원 전경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797번지 강평(江坪)마을에 있는 자동서원은 1만6500㎡(500여 평)의 땅에 담장으로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을 구분했으며,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자(一字)로 배치된 형태다.

강학 공간에는 제창문, 현판이 달린 대문이 있고 자동서원 현판이 달린 강당에는 양선재(養善齋) 육영재(育英齋)가 있다. 외삼문 앞에는 수호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풍수적 입지를 고려하여 건축된 자동서원은 그 위치한 곳이 용이 뒤틀린 형상으로 근처에 인공 연못을 조성했다.
자동서원 현판
자동서원(紫東書院)은 ‘자양산(紫陽山) 동쪽에 있다.’, 제창문은 ‘선비들이 아름답게 모인다.’, 양선재(養善齋)는 ‘공부하며 인선을 함양한다’ , 육영재(育英齋)는 ‘영재를 가르친다.’라는 뜻이다.

자동서원의 뿌리는 1780년 연봉서당(連峰書堂), 사당은 세덕사(世德祠)로 강설(姜渫), 강여호 부자의 학덕을 숭모하며 문중의 자제와 다른 문중의 자제들을 교육하던 서당이다.
자동서원의 뿌리인 운봉서원 현판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원장 김기찬(金驥燦.전 사헌부정언), 안동 사양서원(泗陽書院) 원장 이동필(李東泌), 병산서원(屛山書院) 원장 이제, 매림서원(梅林書院) 원장 박민국(朴敏國), 낙봉서원(洛奉書院) 원장 김태온(金兌溫), 동락서원(東洛書院) 원장 장수훈(張壽勳), 예천 권진한, 함창 권상규, 상주 조택수, 선산 남명택, 용궁 정인희, 안동 권충언 등 555명의 영남 서원과 유림에서 1804년부터 1807년 4년에 걸쳐 발의해 서원 건립에 필요한 자금 확보하고 공사를 시작한 지 4년 뒤인 1811년에 완공해 자양사(紫陽祠)라 했다.

186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1921년에 송계서당 통문에 의하면 도내 유림에서 서원 복원에 필요한 막중한 비용을 본손 에게만 맡겨 둘 수 없다 하고 여성무, 최학길, 송준필 등 500여 명이 참가했으며, 1923년에 서원과 사당을 완공해 강설(姜渫), 강여호, 강석구(姜碩龜), 강이화(姜履和)를 봉안했다.
훌륭한 선생을 숭상하며 모신다는 의미의 자동서원 사당 상의사(尙懿祠)
1927년에 자동서원(紫東書院), 사당은 상의사(尙懿祠)로 현판하고 강당은 야성(冶城) 송준필(宋浚弼)의 경거당(敬居堂) 기문이 있다.

상의사(尙懿祠)는 훌륭한 선생을 숭상하며 모시는 사당, 재명문(齋明門)은 사당에 들어갈 때 몸을 정갈하게 하여 마음을 밝게 한다는 뜻이다.

매년 봄가을로 향사하다가 2000년부터 유림에서 3월 초정(丁)에 한 번만 향사한다.
연못이 있던 자리
△입지환경과 건물배치.

금릉의 남쪽 덕유산맥이 굴곡해 자양산에 이르고 또 굴곡해 연봉 아래에 이르러 자동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앞에는 강곡 천을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강곡천너머 응봉을 문필봉으로 삼았다.

일반적인 서원의 건축유형인 전학후묘(前學後廟)에서 벗어나 강당과 사당을 좌우로 나란히 놓은 좌묘우학(左廟右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은 담장을 쌓아 구분했으며, 두 공간을 출입하는 문도 별도로 냈다.

자동서원이 자리한 터는 예부터 풍수지리로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명당으로 알려졌는데 훗날 서당과 서원을 이 자리에 지은 것이 등용문(登龍門)과 같이 거쳐 간 인재들이 큰 인물이 되라는 염원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동서원의 강당인 경거당
△경거당(敬居堂)

경거당은 야성(冶城) 송준필(宋俊弼)이 ‘경거당(敬居堂)’이라 현액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툇간을 둔 전툇집 구조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시멘트와 혼합해 쌓은 방식인데 근년에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은 후 원주를 세우고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대청마루 좌우로 양선재(養善齋)와 육영재(育英齋)라고 이름한 정면, 측면 각 1칸 규모의 온돌방을 넣었다.
자동서원의 현관인 제창문, 현판이 사라져 이름을 알 길이 없었지만 자동서원을 관리하고 있는 강용규씨가 최근 문서를 입수해 제창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방앞의 툇마루를 놓았는데 대청마루보다 턱을 높인 고상 마루로 하고 계자난간을 달았다. 이것은 난방을 위한 아궁이를 마루 밑에 설치하기 위한 공간확보 차원에서 마루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좌우 방의 측면과 후면에는 쪽마루를 달아 처마 밑 활용도를 높였다.

대청마루 뒤로는 벽면 전체를 머름과 판문을 설치해 채광과 통풍을 고려했다.

심하게 굽은 대들보를 사용해 앞쪽은 종보와 중도리가 결구되는 사이에 동자주를 받쳤는데 뒤쪽은 동자주 없이 직접 중도리와 종보를 얹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경거라는 것은 ‘거경궁리(居敬窮理)에서 나온 말로 정이, 정호, 주자에 이르기까지 학문수양의 기본 방편이 되었던 원리로서 학문하는 자의 내적인 마음가짐과 외적인 행동수칙을 통칭하는 성리학의 가르침이다.

△배향자.

강설(姜渫 1583∼1651)=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보(淨甫) 호는 남와(南窩)이다. 조부는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역임한 강부(姜符)이며 부친은 참봉(參奉)을 지낸 해로(海老)와 모친 고성이씨(故城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충남 회덕 자운동에서 출생했다.

부인은 김천 구성 광명리(기를마을)의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선생의 딸을 맞이했고 1612년(광해군4)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에 입격해 진사(進士)가 되고 1628년(인조6)에 처향(妻鄕)인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으로 낙향했다.

이후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갔을 때 지인(知人)이 다가와 돈이 있으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고 공에게 접근하여 회유하기에 “벼슬이 사람을 욕되게 한다” 하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내려왔다.

이후 1634년(인조12) 향중의 유림의 협조를 얻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김산향교(金山鄕校)의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재건했고, 아들 여구와 여호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복원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향내 유림에서는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해 서울로 진격하던 중 남한산성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슬퍼하면서 돌아왔다.

그 후 조부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경학(經學)에 전심했으며 1780년(정조4)에 유림의 청원으로 조마 강곡에 위치한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다.

행장(行狀)은 입재(入齋) 정종로(鄭宗魯)선생이 쓰고 현손(玄孫) 학암(鶴巖) 석구(碩龜) 공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며 묘소는 김천 감천면 용호리(복호마을) 고당산자락에 있다.

강여호(1620∼1682)=본관은 진주(晉州) 아버지 진사 강설(姜渫)과 어머니 성산여씨(星山呂氏)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딸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숙(啓叔)이며 호는 기재(耆齋)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여 스승이자 삼종조(三從祖)인 복천공(復泉公) 강학년(姜鶴年)은 “후세까지 가문을 빛낼 아이라고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1654년(효종5) 식년문과에 급제해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으며 외직으로 함경도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역임했는데 재임 중 임금이 공에게 직언을 요청하자 시폐(時幣) 수천언을 문장으로 진언했다.

외직으로 있을 때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강진현감(康津縣監) 재임 시에는 백성들의 소송을 간결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을 덕(德)으로써 교화시키니 백성들이 감화되어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종성부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공의 “행장에는 아무 물건도 없었고 오직 침구만 있으니 은혜 입은 백성들이 하루라도 제집에 모시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1675년(숙종1)에는 수찬(修撰)과 응교(應敎)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충언을 드려 숙종이 가납(嘉納)한 것이 많았다. 1677년(숙종3)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첫머리에는 덕을 닦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재아를 해소하고 하늘에도 응답하는 근본이 됨을 말하고 중간에는 요역이 번다한 것과 죄수가 오래 적체된 매우 외람된 벼슬을 공과에 맞지 않게 시행하는 것과 호패(號牌)는 마땅히 시행해야 한다는 것들을 말하고 끝에는 또한 육진(六鎭)과 군민(軍民)의 폐해를 말한 것으로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고 상소를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는 채택하는 바가 없었다.

1679년(숙종5)에 장손의 혼사 비용에 쌀 4섬을 변통해 달라는 집안의 전갈을 받고는 사사로운 내 집안의 손자 혼사 비용에 공금을 축낼 수는 없다 하고는 그저 웃고 말았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효종. 현종. 숙종의 3대의 임금을 모시되 청백리로서 사심 없이 충언을 서슴지 않았고 만년에는 향리로 낙향해 선친의 유훈을 이어 김산향교(金山鄕校)의 동·서재(東·西齋)를 완공하여 향토의 인재 육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1780년(정조4) 유림의 청원으로 김천 조마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으며 행장(行狀)은 이광정(李光庭)이 쓰고 묘갈명(墓碣銘)은 김천찰방을 역임한 이헌경(李獻慶), 글씨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썼으며 묘소는 김천시 감천면 용호동(복호마을) 고당산자락에 안장되어있다.

유집으로 ‘기재집(耆齋集)’이 전한다.

야성(冶城) 송준필(宋浚弼)의 경거당(敬居堂) 기문
강석구(姜碩龜 1726∼1810)=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낙서(洛瑞) 호는 학암(鶴巖))이다. 아버지는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인 진환(震煥)과 여헌(旅軒) 선생의 현손(玄孫)인 옥산장씨(玉山張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자질이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 차이점이 많았다. 놀기를 좋아하여 여러 아이와 냇가에서 놀다가 사람 두골이 있는 것을 보고는 여러 아이가 놀라 달아나거늘 공은 홀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두골을 옷가지로 싸서 묻으니 그 일을 전해 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로는 독서에 잠심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않으니 부친이 공의 병이 날까 두려워 서책을 모두 치우기를 반복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1768년(영조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합격했으며 같은 해에 영조 임금으로부터 어필(御筆)을 하사받았는데 ‘今年臘月中旬日 甲戌干支誦戮莪(부모가 안 계심을 한탄하는 시경의 편명이다.)’

이 어필첩 오른쪽 위에는 하사한 기록과 오른쪽 아래에는 직접 “임금의 글씨를 감춘 것을 9년 뒤 병신년에 열람하니 임금님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으나 선어(仙馭)를 잡아 보지 못하니 슬픔으로 눈물이 흐릅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기록하여 자손 대대로 보배로 삼노라” 라는 1776년 9월 21일 쓴 발문이 있고 왼쪽 위에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쓴 발문이 있어 한층 더 어필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1786년((정조10)에 사헌부정언(司憲府正言)이 됐다.

1789년(정조13)에는 부사과와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서원(書院)을 함부로 세워 백성들에게 폐가 많음을 상소하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귀양지에서 하세한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을 위해 죄를 풀어 줄 것을 상소해 강직함을 드러냈다.

1796년(정조20) 임금에게 바른 학문을 밝혀 풍속을 두껍게 하고 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여 선비들의 습속을 바르게 하는 등 10개 조목의 시정안의 상소를 올려 비답(批答)을 들었으며 1797년(정조21) 봄에 정조의 명으로 향례합편(鄕禮合編)과 형약(鄕約)을 반포(頒布)하라는 윤음(綸音)을 모든 군(郡)과 현(縣)에 내려 고루 행하게 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도움이 될 방법으로 삼으려 했다.

1805년(순조5) 한성우윤(漢城右尹)을 역임하고 다음 해에는 부총관(副總管)에 1809년(순조9)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나라에 어려움이 있으면 녹봉(祿俸) 받기를 부끄러워했으며 1810년(순조10) 향년 85세로 하세하니 임금이 “자손 대대로 청백리 집안으로 이어가라”하면서 제문과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그 후 1923년 유림의 청원으로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으며 행장(行狀)은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이 쓰고 묘지명(墓誌銘)은 지애(芝厓) 정위가 짓고 묘갈명(墓碣銘)은 매당(梅堂) 이만우(李晩佑)가 지었으며 구성 출신 여재동(呂載東)이 썼다.

묘소는 김천 남면 초곡리 봉화산자락에 위치하며 유집으로 ‘학암집(鶴巖集)’이 전한다.



강이화(姜履和 1741∼1828)=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혜(子惠) 호는 호은(湖隱)이며 여구의 현손이며 아버지 일복(日復)과 어머니 아주신씨(鵝州申氏) 사이에서 김천 구성 광명(기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관후하고 응중(凝重)하여 보는 이들이 크게 기대했다.

효심이 깊어 조석으로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는 등 어린 나이에 문장이 탁월하게 드러나 명성이 인근 고을까지 파다했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와 도의로서 사귀었으며 특히 성리학에 전념하여 출세에 마음을 두지 않아 세 번이나 현감(縣監)에 천거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했다.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저서로는 ‘정주학논설(程朱學論說)’, ‘천문지리(天文地理)’, ‘명승지답사기(名勝地踏査記)’등의 유집으로 필사 초고본 10권이 전하고 있으나 간행되지는 못했으며 문장이 ‘재남문집(霽南文集)’, ‘근암집(謹庵集)’ 등에 실려 전한다.

1923년 유림의 청원으로 자동서원(紫東書院)에 배향됐다. 묘소는 김천 증산면 황항리 마을 앞산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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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기 기자 ygpark@kyongbuk.com

김천,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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