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풍수지리 명당 '인재의 보고'

홈실마을은 성주군의 초전면 소재지에서 김천 방향으로 913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월곡저수지 위쪽에 위치한 다섯 곳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을 이루는 다섯 마을은 덤뒤(濟南), 안골(內谷), 뒷미(陶山), 새뜸(新溪), 배나무골(梨洞)으로 50가구에 69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규모의 마을이다.

흔히들 성주를 ‘성씨의 고장’이라 한다. 전국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 성주 본향의 성씨가 많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중에서도 이(李)씨의 본관이 여섯이나 있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성주육이(星州六李)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성주육이는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여섯 이씨로, 광평이씨, 경산이씨,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가리이씨를 말한다. 가리이씨의 가리는 옛 성주의 속현이다. 이러한 성씨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성주 군내에는 성주육이의 집성촌 또한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홈실마을은 이러한 집성촌의 대표적인 곳으로 일부 타성이 있으나 대부분의 주민은 벽진이씨로 구성되어 있다.
 

홈실마을 진입부의 명곡동천 표지석

△원나라 황제가 지어준 마을 이름.

마을 이름인 홈실(椧谷)은 고려시대까지 올라갈 정도로 그 연원이 오래되었으며, 그 지명의 유래가 멀리 중국의 원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벽진이씨의 홈실 입향조는 시조인 이총언의 7세손인 광록대부 이방화(李芳華)인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세 임금에 걸쳐 벼슬한 이견간(李堅幹)의 대에 마을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견간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시의 원나라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는데, 황제가 그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살고 있는 곳을 물음에 호음곡[好音谷]이라 하며 그 그림을 그려 바치니 황제가 보고 마을에 물이 부족하겠다 면서 산의 물을 당겨 올 수 있도록 명(椧·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물을 당긴다는 뜻)곡으로 마을 이름을 정해 주었다고 한다.
 

홈실마을 전경(산자락에 붙어 마을의 중심인 덤뒤, 안골, 뒷미마을이 보인다.)

△성주의 다섯 곳 이름난 터의 으뜸.

홈실에 대해서는 성주의 다섯 곳 이름난 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대구의 대명동이 유래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명나라의 풍수가였던 두사충(杜思忠)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왔다가 귀화하여 대구에 살면서 성주 지역을 둘러보고 다섯 곳을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지목하였는데, 그 중의 한곳이 바로 홈실마을이다.

그가 지목한 다섯 곳은 홈실과 수륜면 수륜리 윤동마을,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선남면 오도리 오도마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웃갓마을(이곳은 인조 이전까지 성주목의 속현인 팔거현이었다) 등인데, 이설은 있으나 두사충이 홈실을 첫 번째 명당으로 꼽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홈실마을은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근현대에 이르러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다.
 

산화 이견간을 제향한 문곡서원

△산화 이견간과 문곡서원.

사신 가다가 관동에서 두견새 울음을 듣고(奉使關東聞杜鵑) 객관에서 꺼진 등에 불 댕기니 한 점의 불 뿐인데(旅館挑殘一盞燈) 꽃바람을 쐬게 하니 중보다 더 얌전히 너울거린다.(使華風味澹於僧) 창밖에 두견새 밤이 다하도록 울어 예니(隔窓杜宇終宵聽) 두견새 울음 산화(山花) 속에 쏟아지는 꽃잎들 몇 겹이나 쌓일꼬(啼在山花第幾層)

이 시는 홈실마을 출신인 국헌 이견간이 1317년(충숙왕 4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갈 때 중국 땅 상주(常州) 객관에 머물면서 두견새 소리를 듣고 지은 시로, 이 시가 세상에 퍼져 널리 회자(膾炙)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그 시의 끝 구절에 나오는 말을 따서 그를 국헌 선생이 아닌 ‘산화 선생’이라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된 시이다.

문곡서원내에 조성된 문안공 산화 이견간 신도비

조선전기의 문신인 서거정(徐居正)은 이 시를 동방(東方)에서 두견(杜鵑)을 읊은 시 사절(四絶) 중 가장 뛰어나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동문선’을 편찬하면서 이 시를 포함하였다.

이렇듯 이견간은 시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특히 ‘춘추’에 대한 조예가 깊어 그 명성이 중국에도 알려졌다.

홈실마을의 작은 마을인 뒷미에는 그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문곡서원이 있다. 서원은 1750년(영조 26)에 창건되었으며,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문곡서당으로 보존하여 오던 중 1989년에 복원하였다. 지금도 매년 춘추에 향사를 올리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중심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완정 이언영의 종택인 완정고택

△완정고택과 완석정 이언영

홈실마을의 작은 마을인 덤뒤 안쪽에 위치한 완정고택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3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조선중기 인물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의 종택이다.

가옥은 사랑채·안채·대문간채·사당·내·외삼문 등 6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처음 건축 시에는 초가 6칸이었던 것을 1947년에 종손 이영기가 철거하여 현재와 같이 고쳐 짓고 이 건물과 맞 잇대어 대문간채 3칸을 건립하였다. 안채는 정면 5칸·측면 5칸반 규모로 중앙부에는 정면 3칸 대청마루가 있고 좌우에는 직교(直交)한 익사(翼舍)가 한단 낮게 전후로 돌출하여 ‘H’형에 가까운 배치를 하고 있다. 사당은 1984년에 기존건물이 노후해 신축했고 원래의 사당건물은 현재의 내삼문으로 개조하였다.

완정 이언영은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정온(鄭蘊)이 영창대군의 원통한 죽음을 항의하다 역적으로 몰리자 이를 변호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승지를 거쳐 청주·선산·밀양부사를 역임했고 저서로 ‘완정집(浣亭集)’이 남아 있다.
 

와가와 토담으로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뒷미마을 전경

△귀향귀촌으로 마을을 지켜내다

봄철을 대표하는 과일인 참외는 전국에서 성주군이 대표적인 재배지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성주 주민들의 대부분이 참외재배가 주 소득원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홈실마을은 참외농가가 한 농가만 있을 뿐으로 벼농사를 짓거나 묵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된 것은 주민들이 대부분 고령화되어 있어 직접 농사를 짓기 어려울 뿐 아니라 참외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조건도 영향을 미친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참외 등 주 소득원이 부족함에도 홈실마을이 예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터인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 외지로 나갔던 출향인들의 귀향과 귀촌으로 인해서 요즘 농촌지역의 일반적인 인구감소 현상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이래 벽진이씨의 집성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홈실마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고의 명당을 찾아 귀향·귀촌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면, 홈실마을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성주의 이름난 터로서 그 명성을 잇게 될 것이다.

△성주 인재의 보고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홈실마을은 조선시대는 물론하고 근현대에 이르러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홈실마을이 배출한 근현대 인물들은 수 십명의 박사가 나왔다 라고 알려질 만큼 많이 배출되어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먼저 제서(濟西) 이정기(李貞基)는 도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제강점기 유림단독립운동(속칭 파리장서 사건) 등에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현대 이후에는 교육계에 이인기 전 영남대학교 총장, 이완기 전 초전초등학교장, 이완순 전 벽진초등학교장, 이태순 전 대구공고 교장, 이인순 전 대구대 교수, 이문수 전 대구대 대학원장, 이재순 전 건국대 교수, 이우붕 경북대 교수, 이선하 공주대 교수 등이 있다.

또한 정·관계에는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윤기, 정보통신부 장관과 KT회장을 역임한 이석채, 정보대학원장을 지낸 이외수, 주케냐대사를 지낸 이석조,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이석영, 서울 농업기술센터소장을 지낸 이석우, 용산구총무국장을 지낸 이종건 등이 있다.

법조계에도 이우정, 이현숙, 이호승 등의 마을 출신 인사들이 활약하고 있으며, 재계·금융계에 ㈜태일자동제어 이종웅 대표, 국민은행 부행장을 지낸 이달수, 이상윤 외환은행 지점장, 이남수 기업은행 지점장 등이 있다.
 

마을진입부 큰바위에 새긴 홈실마을 예찬글(이윤기 지음)

홈실마을 예찬 (이윤기 지음)

백양산(白陽山) 두 팔 벌려 삶의 터전 이룬 곳
벽이(碧李)의 요람이라
조선(祖先)의 숨결이 구백년(九百年) 깃들어

산하(山河)는 비경(秘境)이요 인심 좋고 인건 나니
세인(世人)들은 천하(天下)의 명지(名地)라
명곡동천(椧谷洞天) 예찬하네

세파(世波)에 시달리고 지친 몸 언제나
포근히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
홈실이 아니던가

돌 하나 풀 한 포기 더 없이 정겨워라
우리는 이 땅을 기리 사랑하며
심신(心身)을 맡기고저...

오가는 나그네여! 잠깐 발길을 멈추어
술 한 잔 나누면서 행운유수(行雲流水) 벗 삼아
생(生)을 찬미하지 않으려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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