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원수' 청나라 도울 수 없다며 순절…조용히 지켜낸 충절
1793년 종 8품 사맹 이사룡(司猛 李士龍·1595~1640)의 제사를 담당했던 고관대작이 줄줄이 날아가거나 감봉을 당했다. 승정원의 우승지와 향실의 관원이 파직당했고 경상도관찰사가 3등급이나 감봉 조치를 받았다. 왕실의 비서실 실세와 종2품 관찰사가 종8품 하급무관의 제사를 지내는 것도 의아했지만 제사가 잘못됐다고 파직 감봉조치를 받은 것은 더더욱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정은 이렇다. 이사룡은 명청전쟁 때 청나라를 돕기 위해 전쟁에 동원됐다가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 군사를 향해 총을 쏠 수 없다며 총알이 없는 빈총을 쏘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그 후 그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아이콘이 었다. 정조는 이사룡을 제향하는 성주 충렬사에 사액을 내리고 왕명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런데 얼빠진 관리들이 제문에 청나라 연호를 썼다. 정조는 ‘이는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으니 제문을 고쳐서 게시하고 제사를 다시 지내주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제사에 관계된 인사들을 줄줄이 내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제문을 지었다.
“아, 그대의 뛰어난 절의는
주하에 또한 드물었으니
청 나라와 명 나라의 전투에서
전함이 서로 동요했네
그대가 눈을 부릅뜨고 보며
대포를 쏘되 탄환을 넣지 않았으니
청 나라 장수가 성내며 흘겨보고
명 나라 군졸이 소리로 환호했네
흰 칼날이 삼대와 같이 밀집하여
병기의 독을 이에 드러내었으니
깃발이 멀리서 돌아오니
성명이 빛났다네”
- 정조가 쓴 ‘증 성주목사 이사룡 치제문’
이사룡의 벼슬은 정8품 사맹이다. 전쟁터에서 그는 군사 50명을 지휘하는 기총(旗摠)을 맡았다. 지금의 중대장쯤 된다. 자는 사중(仕中) 호는 괴정(槐亭)이다. 아버지는 사복시첨정을 지낸 이정건(李廷建), 어머니는 거창유씨다.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서 태어났다. 고조와 조부, 아버지가 무과에 급제한 대대로 무인 집안이다. 이사룡은 체격이 건장하고 담략이 뛰어났으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집안의 전통대로 무과 급제를 목표로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영청 군졸로 군영에 들어갔다.
정묘년에 이어 병자년에 호란이 일어났고 1637년 1월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이마를 찧고 난 이후에야 겨우 불안한 평화를 얻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삼전도에서 항복을 할 때 조선 군사를 파병해 청나라를 돕는다는 조건이 종전 협상 11가지 옵션 중 하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그해 12월 2일, 이사룡의 이름이 ‘승정원일기’에 등장한다. 한미한 군졸이 공식 역사 기록에 등장한 까닭은 그날 윤방 영중추부사, 정두원 지사 등 무관직 77명에 대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룡은 당당히 정8품 사맹에 이름을 올렸다. 군졸이 무과 급제자나 가능한 무관벼슬에 어떻게 올랐는 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 이정건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사복시첨정으로 인조를 호위했는데 그 공으로 이사룡이 무관직을 제수받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1640년 청나라는 명나라의 금주성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청은 금주성이 좀처럼 무너지지 않자 조선 군사의 파병을 요청했다. 봄에 1차 파병을 나갔던 임경업의 조선 수군이 돌아왔고 그해 늦가을에 2차 파병이 결정 났다. 그때 이사룡은 성주 고향에 머물고 있다가 소집을 명받았다. 1641년 2월 20일 전국에서 징발된 5000여 명의 군사들이 한양을 출발해 한 달 만에 심양에 도착했다.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열병식을 거행했다. 전투 현장인 금주성(현재의 중국 요령성 금시)에는 3월 24일 도착했다. 4월 초에 조선원군에게 청병의 선봉에 나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사룡은 50명의 포수를 이끄는 기총으로 전쟁에 나섰다.이사룡은 화총에서 탄환을 제거하고 빈총을 쏘아댔다. 이사룡의 ‘빈총 발사 사건’은 곧 청나라 감독관에게 발각됐다. 감독관은 크게 화를 내며 이사룡을 나무랐다.
그러자 이사룡은 오히려 감독관을 나무랐다. “명과 조선은 의로서 군신 관계이고 은혜로서 부자 관계와 같다. 옛날 명의 신종황제가 베풀어주신 덕은 만세에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자식더러 아비를 죽이라고 하는 꼴이니 어찌 따를 수 있겠는가.” 감독관이 전투에 나서면 상을 주겠다고 달래기도 하고 칼을 목에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으나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빨리 죽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조선 병사들이 그의 마음을 바꾸려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결국 참형을 당했다. 향년 47세였다.
그의 시신은 심양에 볼모로 끌려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수습하여 고국으로 보냈다. 인종은 상여가 지나가는 5도의 방백들에게 시신이 지나가는 길에 어려움이 없도록 조치하라고 명했다. 이사룡의 시신은 성주 좌지원의 묘소에 안장됐다. 이사룡이 죽은 그해 8월, 인조는 성주목사로 부임하는 최유경을 불러 이사룡에게 합당한 포상을 주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
1662년(현종3) 남구만이 양남진휼어사로 성주지방을 돌아보다가 이사룡의 부인 완산이씨에게 쌀 10섬을 주어 생계를 돕고 이듬해 조정에 들어와 아들 선(善)에게 벼슬을 내려 줄 것을 상주했다. 1668년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경연에서 이사룡의 충절을 언급하며 포상을 건의했다. 현종은 아들 선에게 칠포만호를 제수했다. 현종은 이후에도 이사룡의 가족들에게 내린 은전하교가 제대로 이행됐는지 점검했다. 숙종대에 경상도관찰사가 이사룡의 후손이 사는 마을을 직접 방문한 뒤 식물(食物)을 주고 복호하여 군역을 정하지 말도록 하자고 요청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성주목사 정재대는 묘도비를 건립하고 묘갈문을 썼으며 이형상은 95세이던 이사룡의 부인 완산 이씨에게 곡식을 지급하도록 청했다. 오도일은 충렬사를 건립했다. 대사헌 이현일은 이사룡에 대한 포증과 자손의 관직 제수 등을 건의하고 이 같은 내용을 사적 후기에 남겼다.
이사룡이 죽은 뒤 조선의 내로라하는 문인 학자 19명이 그의 전기를 쓰며 충정을 칭송했다. 송시열이 ‘포수 이사룡전(砲手 李士龍傳)을 썼고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청나라 건융제의 칠순연을 축하하기 위한 사행단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때 쓴 기행록이 ‘열하일기’다. 그는 이사룡이 죽은 송산땅을 지나면서 글을 지어 조문했다.
"조선군사 중에서 이사룡은 성주 사람으로서 홀로 의리 때문에 차마 총에 탄환을 재지 못하고 무릇 3번을 쏘아도 아무도 상하지 않았던바 이는 본국의 심정을 밝히려 함인데 청인이 이것을 깨닫고 드디어 이사룡을 베어 조리를 돌렸다. (…) 지금 성주 옥천 위에 충렬사가 있으니 곧 이사룡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진실로 황제로 하여금 사룡의 이름을 듣게 했다면 특별히 시호를 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나는 송산을 지나면서 글을 지어 조문한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언급한 충렬사는 1692년(숙종 18)에 준공됐다. 장영이 상량문을 쓰고 당시 성주목사이던 오도일이 봉안문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충렬사로 편액했다.
□ 이사룡의 유적
충렬사는 1812년(순조12)에 묘우와 강당을 갖춰 옥천서원으로 승원됐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1912년 현재의 성주군 용암면 대봉 2리 봉산 기슭에 중건됐다.
이사룡의 정려각은 대봉리 버스 정류장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이다. 전면 한 면에만 홍살을 설치하고 나머지 세면은 벽으로 둘렀다. 비각 처마 아래는 ‘정묘조증직정려전교사증성주목사이사룡지려(正廟朝贈職旌閭傳敎士贈星州牧使李士龍之閭)’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고 비각 내부에는 비석 없이 비석 받침으로 쓰였던 돌만 놓여 있다. 내부 상부벽체에 ‘대명충신조선의사증성주목사이사룡지려(大明忠信朝鮮義士贈星州牧使李士龍之閭)’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비각 입구 계단 아래 신도비가 서 있는데 이종기는 비문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의리에 죽는 것이 어렵고, 의리에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되 조용히 의리를 취하여 죽는 것이 더욱 어렵다. 우리 조선의 삼학사(三學士)가 남한산성에서 잡히던 날에 죽지 않고 심양에서 죽은 것은 바로 이러한 도리를 쓴 것이니, 의사 이공 또한 죽되 조용히 의리를 취하여 죽은 분이로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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