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명 의병 이끌며 영천성 탈환전투에서 혁혁한 전공 세워

용계서원 전경.

△향교 연회장에서 전해 들은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4월 15일. 최문병(崔文柄, 1557-1599)은 자인향교에서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연회를 열고 있었다. 연회가 무르익어 한창 흥이 오를 무렵 앞산에서 한 떼의 남녀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에 쫓기는지 통곡을 하면서 왔다.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인 뒤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들은 경남 양산관아의 관속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 전 13일에 왜구가 침입하여 동래를 함락시키고 이어 언양과 양산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어 자인까지 올라오는데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연회는 그 자리에서 파했다.

최문병이 연회를 열고 있을 당시 앞뒤 상황은 이렇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 1만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후속부대인 가토 마사요사의 2번대 역시 2만2800명을 군사를 이끌고 18일 부산포에 당도했다. 같은 날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3번대 1만 명이 김해에 상륙했다. 1번대는 중로(中路)를 공격루트로 삼았다. 동래-양산-청도- -대구-선산 상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코스다. 2번대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령-군위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는 좌로(左路)를 맡았다. 3번대는 김해-성주-무계-지례- 금산-추풍령을 지나 서울로 가는 우로(右路)를 담당했다. 자인은 왜군 1번대가 지나가는 청도와 2번대가 공략하는 영천 사이에 끼었다.

이런 상황을 시골선비 최문병이 알 리 없었다. 자인현은 경주부의 속현이었지만 경주에서 120리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 양산 관속이 피난을 오기 전까지 전쟁이 난 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청도와는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영천과도 고작 20리 길이다. 최문병은 서둘러 가족과 노복을 데리고 사당의 신주를 받들어 현의 동쪽에 있는 구룡산 물한동에 피난했다. 물한동은 산세가 깊으면서도 동쪽으로는 경주, 남쪽으로는 청도, 북쪽으로는 영천으로 이동이 좋은 곳이었다. 부친 최식과 모친 경산전씨의 묘소가 있어 그 자신 이 일대 지리에 밝은 점도 피난처로 유리했다. 마을에서 수십 명이 따라왔고 왜란 소식을 자인에 처음 알린 양산 관속도 함께했다. 자연스레 최문병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이 물한동에 모인 것이다.

△탄탄한 지역민들의 신망을 업은 35세의 의병장

최문병의 호는 성재(省齋), 자는 일장(日章), 본관은 영천이다. 아버지 최식(崔湜)과 어머니 경산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남 3녀의 2남으로 태어난 곳은 자인현 울곡리다. 최문병은 외가 경산전씨의 학문적 위상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외숙 전경창(全慶昌)에게서 수학했다. 전경창은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대구에서 퇴계문인록에 등재된 이는 전경창 채응린 두 사람뿐이다. 이황 문인이었던 이숙량과 함께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설립하며 대구 유림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최문병이 강학하던 인지헌.

최문병은 외숙의 학맥과 인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대구 경산 지역에서 널리 인정을 받고 있었다. 가세도 넉넉해 23세 때 사비로 천장산 아래 인지정사(仁智精舍)를 짓고 강학했다. 전경창이 식년문과에 급제해 중앙관계로 진출하자 그의 제자들이 대거 전경창과 친분이 있던 정구(鄭逑) 문하로 들었다. 최문병도 28세 되던 해 정구의 성주의 회연초당을 찾아가 문하에 들었다. 최문병은 자연스레 영남학풍을 계승했고 대구지역 유림과 탄탄한 연대를 갖추게 됐다. 경주지역 명사들과도 교류를 탄탄히 했다. 경주부윤 이현배(李玄培)와는 각별했다. 최문병은 31세에 효행으로 향천에 선발됐다. 그는 지역에서 높은 명망과 신뢰를 얻었다. 지역에서 발간한 ‘경상도읍지’ ‘자인읍지’ 등 5종의 읍지가 그의 효행을 기록하고 있다.

최문병은 전쟁이 발발하기 2-3년 전부터 나름대로 왜란에 대비하고 있었다. 지역 유생과 강학할 때 왜란에 대비해 토론하고 활과 화살, 창 등을 만들어 두었다. ‘자전자수(自戰自守)’ 내 손으로 내 땅을 지킨다. 전쟁이 나자 향토방위를 우선으로 의병진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5월 2일 최문병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전쟁 소식을 들은 지 보름 조금 지난 때이다. 그는 사방에 통문을 돌렸다. 김홍, 유인춘, 박영성 등 5, 6명이 구룡산으로 찾아왔다. 최문병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천장산에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맹세하고 베를 찢어 깃대를 만든 뒤 왜구를 이 땅에서 괴멸시키자고 결의했다. 이상 박몽량 김우속이 창의에 동참했으며 외숙 전경창의 문인으로 인연을 맺은 이춘암 최동립도 진영에 들어왔다. 2000여 명이 모였다. 부대는 좌우 2대로 편성하여 김홍을 우대장, 유인춘을 좌대장으로 삼았다. 박영성은 선봉대장, 권삼로는 후원대장, 이상은 총대장을 맡았다.

용계서원 강당.
최문병신도비.

△청도 두곡, 선암전투에 이어 영천성 탈환

5월 11일 첫 전투가 오목천에서 벌어졌다. 왜군이 경산과 청도의 길목인 성현에서 넘어와 자인으로 흐르는 오목천에 진을 치고 민가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총대장 이상이 돌격전을 벌여 적병 수십 명의 목을 베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이 더 많았다. 첫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사기가 충천했다. 16일에 왜군이 자인까지 들어와 약탈을 벌였다. 최문병이 직접 의병을 지휘하여 청도 동창까지 쫓아가 수백 명을 죽이고 병기 수백 개를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청도의병장 박경전이 찾아와 연합작전을 제의했다. 청도와 자인은 ‘입술과 이’ 같은 사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쾌히 승낙했다. 이 전투가 두곡전투다. 20일에 정예군 2,000명을 이끌고 청도의 박경전부대과 연합해 두곡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수백 명을 죽이고 조총 100자루와 탄환 100말을 노획했다. 왜구들은 황급하게 달아나다 언덕에 떨어져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총대장 이상을 잃었다. 이상은 승세를 몰아 삼족대의 요처까지 적을 추격하였으나 반격을 받고 수세에 몰리던 중 칼을 뽑아 자결했다.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고 후한 장례를 치렀다. 윤기를 총대장으로 삼았다.

두곡전투를 승리로 이끈 자인 청도 연합부대는 적들이 청도 운문산 자락 선암으로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연합부대는 적들을 선암 앞 동창천으로 유안한 뒤 강의 양쪽에서 협공했다. 5000여 명의 적군 중 살아나간 자가 100여 명에 불과했다.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보니 초유사 김성일이 이문(移文)을 보내왔다. 이문은 관청 사이에서 주고받는 공문서로 최문병의 의병부대를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영천성 수복이 급선무였다. 영천성에는 왜구 1000명이 남아 인근지역을 약탈하고 있었다. 최문병은 병력 1,000명을 이끌고 권응수를 방문해 영천성을 수복하자는데 의기투합했다. 7월 24일 각 지역의 의병장들이 군사를 모아 영천에 집결하니 병사가 3500명이나 됐다. 의병장으로 임명된 권응수는 의병부대를 3대로 나누었다. 권응수를 대장으로 신해가 좌총, 최문병이 우총, 정대임이 중총을 맡고 홍천뢰가 선봉장이 됐다. 깃발에는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라 썼다. 안강에 있던 병사 박진이 영천성 소식을 듣고 군기와 화약 등 물품을 보내왔다. 26일 영천성탈환작전이 개시됐다. 최문병은 우군총수를 맡아 성 아래까지 공격했다. 적들은 성위에 둘러서서 조총을 빗발같이 쏘아댔다. 의병들이 방패로 막으면서 성에 다가가자 적들이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그 자리에서 수백 명을 죽였다. 적들은 성으로 들어갔다. 27일 아침에 성문에 이르렀으나 적들이 굳게 지키며 반격하는 통에 모든 장수들이 감히 성에 오르지 못했다. 그때 최문병이 선두에 나서 성을 넘었다. 드디어 영천성을 탈환했다.

△최문병의 유적지

최문병은 8월 16일 특명으로 조산대부 별제를 제수받았다. 9월 10일 장기현감에 임명됐으나 여러 날 전투를 치르면서 병을 얻어 취임하지 못했다. 최문병은 경주, 울산까지 나아가 적들을 물리쳤다. 7월에 어모장군 훈련첨정으로 승진했다. 1595년 10월에 물한리로 옮겨뒀던 공자 위판을 다시 향교에 걸고 가족을 본가로 데려왔다.

최문병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병을 얻어 4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가선대부 한성부우윤에 추층됐다. 1603년 자인의 유생 이춘암 등 50인이 자인향교 재건립을 논의하면서 최문병을 거론했다. 최문병 같은 의병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향교에서의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논리였다. 선조는 기꺼이 향교 재건립을 윤허했다. 죽은 최문병이 무너진 향교를 세운 셈이다.

최문병을 제향하는 충현사.

1712년(숙종38) 사당을 지어서 위패를 봉안하고 충현사(忠賢祠)라 했다. 1786년(정조10) 용계서원(龍溪書院)으로 원호를 높여 불렀다. 현재의 용계서원은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에 있다.

최문병이 강학하던 ‘인지재’는 용계서원 근처에 있다. 경산시 향토 문화유산 제1호 유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시문집으로 ‘성재실기(省齋實記)’ 가 전한다. 4권 2책의 목판본으로 오언절구 5수 칠언절구 10수 서3편 세계도와 창의록 등이 실려 있다.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글·사진=김동완 작가·한국국학진흥원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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