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아침저녁으로 손을 닦는다. 깨끗하고 고운 것 골라 만지고, 따뜻이 베풀며 살려고 손을 닦는다. 나날이, 아침저녁으로 낯을 씻는다. 머리 감으면 모자 털고, 목욕하면 옷 갈아입고, 맑은 정신으로 살려고 낯을 씻는다. 나날이, 아침저녁으로 입을 씻는다. 입이 보살이란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향기롭게 살려고 입을 씻는다. 나날이,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씻는다. 세상에 밉다 곱다 해도 쓸모없는 사람은 없단다. 미워하지 않고 살려고, 곱다 곱다 하면서 살려고 마음을 씻는다.
나날이 씻는다. 낯도 씻고, 손도 씻고, 입도 씻고, 마음도 씻고. 나날이 씻는다고 씻어도 다 씻기지 않아 부끄러워진다. 불가의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입조심·말조심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노자(老子)는 얽매임 없이 사는 것. 최고의 선은 물과 같아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바위도 뚫는 물방울의 끈기와 인내, 흐르고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大義), 어느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 포용력,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 물의 덕을 상선이라 했다.
어릴 때, 국민학교 운동회에서 손을 뒤로 묶고 실에 매달린 엿을 입으로 따서 물고 달리는 경기가 있었다. 요리조리 움직이는 엿을 입으로 따라가다가 온 얼굴에 밀가루로 분칠을 하여 한바탕 웃게 하는 경기다. 요사이 높은 어른 중에는 온 얼굴에 밀가루가 아닌 먹칠을 하고 다니는 분이 더러 있다. 입에 험한 말을 달고 다니는 분도 있다. 입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세상이 소란해지는데도 그 뒤에 줄 서는 사람도 있다. 손도 좀 씻고, 낯도 씻고, 특히 입을 많이 씻었으면 참 좋으련만.
굴원의 어부사가 생각난다.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강가에 서성이는데 어부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소?” 굴원이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서, 추방을 당했소.” 어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새로 머리 감은 사람은 갓을 털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옷을 턴다.”라고 대답하니, 어부가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면 되는 것을!”하고 노래하며 떠나간다. 역시 털거나 씻으면 된다고 했다.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저지른 잘못도 진정으로 반성하고 후회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데, 후회하고 반성하기는커녕 더 악한 표정이나 말을 생산해 내고 있다. 어쩔거나. 인간의 존귀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인간에게는 절대로 속이거나 감출 수 없는 양심이 있다. 자신의 양심, 잘못하고 느끼는 부끄러움, 죄를 짓고 느끼는 수치심, 그런 것을 어떻게 송두리째 감출 수 있겠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세상으로 돌아가자.
어린아이 때는 잘못된 행위를 하고 부모에게 들키면 눈부터 몸까지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차차 성장하여 꾀가 들면 말솜씨가 늘고, 변명으로 잘못을 감추려 한다. 나이가 들면 출세와 금전적인 문제, 직장생활 등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된다. 부끄러움은 슬며시 뒤로 감춘다. 금전적인 이익과 출세를 위해 거짓말이 더 는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남을 탓한다. 거짓말이 일상화된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 쉽고도 어려운 일 같긴 하다.
그래도 양심을 찾자. 부끄러움을 아는 세상을 만들자.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존귀함을 지키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