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선산 桃李寺(도리사)를 중심으로 탑도 보고, 부처도 보고, 낙동강도 보고, 맛집도 찾으며 하루를 보냈다. 쌍암고택, 북애고택에서 조선 말 양반가의 생활상을 보기도 했지만, 사찰의 극락전 아미타불을 통해서 늘그막 인생 갈무리를 생각해 보았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이든, 연화화생(蓮華化生)이든, 거인의 광주리에 담겨 단번에 가든, 극락 가는 길이 외길은 아닌 모양이다. 표를 가지고도 시간을 놓쳐 겨우 밧줄에 매달려 가는 청의 동자의 악착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느 길이든 무임승차는 없다. 좋은 마무리로 극락행 표를 구하고 싶다. 욕심인가.
인생 마무리의 첫째가 ‘비움’이다. ‘버림’으로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버림이 ‘비움’이요, ‘나눔’이다. 모래 속에 손등을 묻고 집을 지으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젖니를 실에 묶어 뽑아 지붕 위로 던지며, “헌 이 주께 새 이 다오” 하고 외친 적이 있다. 버림은 삶의 끝이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집지양개(執之兩個), 방즉우주(放則宇宙). 잡아보았자 두 개뿐이요, 놓으면 우주가 온통 내 것이다. 주고 비워야 새집을 얻는다. 우주가 온통 내 것이면 그게 바로 극락이다.
두 번째가 노련미이다. 노인의 ‘老’자는 경륜. know-how다. 많은 경험으로 어려운 일도 풀어낸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도 지녔다. 술을 마셔도 젊은이처럼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부도옹(不倒翁)이다. 나이 든 사람의 지혜를 노마지지(老馬之智)라 한다. 노마지지로 젊은이에게, 사회에 조용히 베풀어야 한다. 요란스럽지 않게 나잇값을 해야 좋게 갈무리가 된다.
세 번째가 ‘점잖음, 어른다움’이다. 노인이 되면 언행이 신중하되 어둡지 않아야 한다. 감성에 쉬이 휘둘리거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늙은이’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이다. 자리를 지키면서 삶의 방향을 잡아주되 말수는 적게, 행동은 점잖아야 대접받고 갈무리할 수 있다.
‘어른다움’이란, 세월에 따라잡히지도 않고, 세월을 거슬러 살지도 않는다. 기꺼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다. 어른다움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라면 ‘어른스러움’은 어른이 아니면서 어른처럼 하는 처신을 말한다.
공자는 어른이 되는 단계를 지천명, 이순, 종심으로 나누어 말했다. 지천명(知天命)은 한계를 받아들여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단계이고, 이순(耳順)은 기분 상함 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과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요, 종심(從心)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 조화로운 삶을 말한다.
인생 갈무리에서 갖추어야 할 일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나이가 들수록 신의(信義)가 있어야 한다. 신의가 없으면 세상살이에서 외면당한다. 예의를 더 지켜야 한다. 예의는 상호존중이다. 젊은이들에게 예(禮)를 잃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인정(人情)이 있어야 한다. 향기 없는 꽃이 벌과 나비의 외면을 받듯이 인향(人香)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외면을 받게 된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이라고 떠들지 말자. 당연히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다.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살되 젊은이들 앞에서 꼴불견, 꼴통으로 넘치지 말자. 명(命)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가족들 앞에서 죽는 것이 고종명(考終命)이다. 아름다운 인생 갈무리다.
천국으로 가는 ‘좁은 문’의 통행권이든, 극락으로 가는 ‘반야용선’의 ticket이든 인생을 멋지게 갈무리하고 받아들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