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네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도래라 가는 뜻을 일러라”
성종 임금이 사직하고 떠나려는 신하를 만류하는 내용의 시조다. 임금이 지켜야 할 체면과 법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인간미가 넘치는 작품이다. 초장은 진솔한 정(情)이 담뿍 담겨 있고, 중장은 보내는 이(성종 자신)의 섭섭한 마음이 서리어 있다. 종장의 ‘하 애도래라’에서, 안타까워서 견딜 수 없는 마음과 귀향의 연유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간곡하게, 숨김없이 담겨 있다. 짧은 노래 안에 군신 간의 끈끈한 애정, 임금의 신하 사랑이 진솔하게 표현되었다.
성리학을 숭상한 조선시대에 왕에 대한 사대부들의 충성 노래가 넘쳐난다. 세종조 재상을 지낸 고불 맹사성은 시조 ‘강호사시사’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일들이 모두 “역군은(亦君恩)이샀다”로 귀결지어 왕의 은혜라고 노래했다.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자자구구(字字句句) 연군(戀君)의 정(情)이다. 그런 시절에 임금이 신하에게 간절한 정을 노래한 시조라서 다르게 눈에 들어온다.
홍문관 교리 유호인은 문장이 좋아 성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가 낙향하려 하자 왕이 만류하며 부른 노래다. 유호인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라고 하자 어머니를 한양으로 모셔오면 안 되겠느냐고 되묻는다. 어머니가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으신다며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자 아쉬워하며 그에게 향리인 의성 현령을 주어 보냈다. 그가 합천군수로 있다가 1494년 병사하자 후한 부의를 보내 장사토록 하였다. 임금의 신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낮에는 요임금과 순임금처럼 정사를 잘 돌봐 주요순(晝堯舜)으로 불린 성종은 그 치세가 ‘문화의 황금기’였다.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역사와 문학, 지리와 음악에 대한 자료들을 집대성하였다. 밤이면 주색잡기에 능해 야걸주(夜桀紂)로 불린 성종은 훗날 연산군에 의한 사화의 피바람을 잉태시켰다. 지나친 주색잡기는 금물인 것을.
성종이 본받으려 했던 왕이 세종대왕이다. 세종 역시 집현전에서 공부하는 신하들을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했다. 한번은 세종이 밤늦게까지 글을 읽고 있었는데 멀리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궁금하게 여긴 세종이 내관을 시켜 알아본즉, 집현전 학사 신숙주였다. 감격한 세종은 자신도 계속 글을 읽었다. 닭이 두 홰를 운 뒤에야 집현전의 불이 꺼졌고, 세종대왕이 거동하여 보니 신숙주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종대왕은 손수 자신의 곤룡포를 신숙주의 등에 덮어 주었다. 세종의 애민정신은 물론 신하 사랑이 극진했기에 많은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임금과 신하의 돈독한 관계로는 정조와 정약용이 으뜸이다. 정조와 정약용은 단순히 학문적, 정치적 관계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정조와 정약용은 뜻이 통하는 각별한 동료이면서, 존경하는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 관계였다. 정조의 후원으로 ‘목민심서’, ‘경세유표’와 같은 학문적 유산을 남긴다. 아름다운 군신 관계다. 봉건 군주 시대에도 군주와 정치하는 신하와 백성의 관계가 아름다울 때 문화가 융성했었다.
정치하는 곳에 인성이 비루해지기 쉽다. 흑백논리로 갈등의 통제가 어렵다. 자기합리화에 배려가 사라진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여 꽃피워가는 손꼽히는 나라가 아닌가. 아직도 머리 터지게 싸워야 민주 투사인가. 소통으로 해결될 일은 없는가? 한참을 생각해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