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황금기의 상징…친일파의 손에 허물어지다

 

대구 도심 속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호흡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경상감영공원은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경상도 지방의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지로 전국에서 수많은 관찰사가 오가던 이 경상감영을 품고 있던 거대한 성벽, ‘대구읍성’으로 떠나보자.

대구읍성 남문(영남제일관).

대구읍성은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샤를 바라(1842∼1893)가 1888년 가을에 조선을 여행했다가 귀국 후 발표한 ‘조선기행’을 통해 ‘대구읍성은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라고 극찬한 문화유산이다.

과거 조선시대, 대구에는 지금의 도심인 동성로를 둘러싸고 있었던 커다란 성벽이 있었다. 이 성벽은 오늘날 성내동과 더불어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지금도 대구 곳곳에서는 이 ‘대구읍성’의 흔적을 만나 볼 수 있다.

바쁘게 흘러가는 현대인들의 시간 속에 그 시간을 함께 걸어온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약령시로 가보면 옛날 대구읍성의 가장 큰 관문이었던 남문인 ‘영남제일관’의 동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영남제일관은 현재 대구 동구 망우당공원에 복원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는 대구읍성의 축성을 기념하는 비인 ‘영영축성비’도 함께 볼 수 있다. 대구읍성은 선조 23년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토성으로 축성됐다.
 

여지도 대구부에 보이는 대구읍성 모습.

하지만 토성으로 축성된 성은 얼마 가지 않아 일본에 허물어지고 만다. 이후 영조 12년, 대구읍성은 석성의 형태로 동문인 진동문, 서문인 달서문, 남문인 영남제일관, 북문인 공북문 4개의 출입로를 중심으로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구와 함께했다. 시간이 지나 일제강점기인 1907년 높이 5m, 두께 8m, 길이 2700m에 이르렀던 대규모 읍성은 일본에 의해 한 번 더 해체되고 만다.

당시 대구 군수였던 친일파 박중양이 일본 상인들의 경제활동과 도시 발전을 이유로 읍성 철거를 독단적으로 진행한다. 그렇게 전국 최대의 한약재 시장이었던 약령시, 달서문 밖의 서문시장과 함께 대구의 황금기를 함께했던 읍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읍성을 허물며 나온 읍성돌은 여기저기로 흩어지게 된다. 지금은 청라언덕에 가면 이 읍성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1900년대 초 대구로 선교활동을 하러 왔던 선교사들이 이 돌을 가져다 초석으로 사용했다. 신명학교, 계성학교, 동산병원에서도 이 읍성돌을 사용하여 기반을 다졌다. 지난 7월 17일에는 대구읍성영상관이 근대골목에 개관을 하며 대구읍성의 역사를 실감형 콘텐츠와 함께 체험해 볼 수 있다.

대구읍성이 현재까지 있었다면 대구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그 읍성은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우리는 그 시간 속을 거닐며 과거를 회상해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그리고 미래가 보이는 곳 대구근대골목에서 대구의 매력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