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제일의 거상, '경제 독립'으로 '국권 회복' 꿈꾸다
“지금 국채 1300만 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를 갚으면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 추세일 것입니다….” - 국채보상운동 취지문(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
1907년부터 나랏빚 1300만 원을 우리 손으로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 대구다.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는 광문사에서 부사장을 지낸 애국지사 ‘서상돈(1851-1913)’ 선생이 있었다. 대구 근대골목에서는 역사의 결이 보존된 서상돈 고택을 만나 볼 수 있다.
대구 중구 골목투어 2코스 근대문화골목 코스 중심 거점인 근대문화체험관 계산예가에는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고택의 마당에서는 이곳을 찾은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내내 북새통을 이루고 제기차기, 팽이치기, 딱지치기를 하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서상돈 선생의 고택도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마찬가지로 도심 개발로 인해 허물어질 위기를 맞았다가 대구 시민들의 서명운동으로 오늘날 이 자리에 보존될 수 있게 됐다.
고택에 들어서면 소박한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다. 조선시대 대구를 대표하는 보부상이었던 서상돈 선생의 명성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천주교 집안이었던 선생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9세가 되던 해에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된다. 집안 가족들에게 장사를 배운 선생은 근면과 성실을 밑천 삼아 사업을 점차 확장해 나갔다. 이후 탁지부 시찰관에 임명되어 경상도 세정을 총괄하였으며,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아 1899년을 전후로 대구읍성 내에 해성재를 비롯한 학당을 설립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서상돈 선생은 지금까지도 국채보상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고관이나 양반, 부유층은 물론 여성과 학생, 승려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참여한 유례가 없는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3년 동안 이어진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각 성을 촉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구근대골목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자취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상돈 선생의 고택에서는 골목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국채보상운동 체험이 진행된다. 국채보상운동공원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기록물과 역사적 사실들을 관람할 수가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는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를 모아놓은 전시 시설을 만나볼 수 있다.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는 계절 가을, 근대 골목을 거닐며 국채보상운동의 뜻을 기려보는 건 어떨까. 이예지 골목해설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