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청송객주문학대전

김진혁作
김진혁作

큰아들이 넓은 운동장을 보자 정신없이 내달렸고 동생이 고함을 지르며 뒤따랐다. 양철은 자신의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두류야구장을 몇 년 만에 와보는 것인지 영철은 순간 계산이 되지 않았다. 우뚝 솟은 타워가 보이는 야구장에서 두 아들이 축구공을 패스하며 뛰어다녔다. 아빠가 축구공을 높이 띄워 차자 두 아들은 탄성을 질렀다. 영철은 두 아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 시간은 타워를 넘어 과거로 이끌었다.

영철은 동네 구멍가게로 들어섰다. 냉장고에서 쭈쭈바를 꺼내 주인아저씨에게 다가갔다. 백 원을 건네고 잔돈 오십 원을 받았다. 영철은 계산대에 두어 번 쭈쭈바를 내려쳐 비닐을 벗겼다. 꼭지를 잘라내기 위해 노란 고무줄에 매달린 연필깎이 칼을 집어 드는 순간, 성호가 뛰어 들어왔다. 성호는 웃으며 영철에게 다가갔다. “영철아, 나도 한입만도. 내가 잘라줄게.” 영철은 쭈쭈바를 성호의 손에 넘겼다. 조금 더 크게 잘린 토막을 입에 물고 영철은 성호의 뒤를 따라 나왔다. 둘은 커다란 사자 문양이 장식된 돌계단에 앉았다. 이미 동네 아이 서너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아이들 발밑엔 과자봉지들이 버려져 있었다. 하루아침에 쌓인 쓰레기가 아니었다. 돌계단은 동네 아이들로 복작거리는 만남의 장소였다.

기름한 얼굴의 언어장애인 아저씨가 아랫입술을 한껏 내밀고 뒷짐을 진 자세로 쭈뼛대며 아이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벙어리아저씨라 불렀다. 언어장애인 아저씨는 아이들 옆에 앉거나 붙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져 벋정다리로 서있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아이들 곁에 있는 건 아니었다. 끼니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해거름 녘에 먼저 모습을 감추었다. 아이들은 언어장애인 아저씨를 벙어리라고 놀리지 않았다. 언어장애인 아저씨는 아이들 놀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선 벙어리아저씨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힘이 엄청나게 세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 이후 영철은 벙어리아저씨가 무섭게 느껴졌다. 말도 못 하면서 휘 뚝하는 몸짓이 무서웠는데 힘까지 세다니. 영철은 언어장애인 아저씨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의 그런 소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네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민석이가 어느 날 언어장애인 아저씨를 때렸다. 두어 번 때린 것 같은데 언어장애인 아저씨는 맞받아 싸우기는커녕 우는 소리를 내며 자기 집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서 가는 언어장애인 아저씨를 보고 바보 같다고 영철은 느꼈다. 어른이 어린애한테 맞고 질질 짜는 모습이 바보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민석이가 못됐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동네 아이가 돌계단 주위와 가게 앞에서 거드럭대고 있으면 민석의 희생양이 되고는 했다. 어린 영철의 눈에 민석은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눈을 마주 보고 말싸움을 하다가 전광석화와 같이 상대방 아이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찰나에 아이는 땅바닥에 퍽하고 쓰러졌다. 새로 이사 온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 아이는 민석에게 맞았다. 아이는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며 억울함을 쏟아냈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잠시 후 엄마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어른이 나서면 대부분 아이는 잘못을 빌거나 도망을 치기 마련이지만 민석은 달랐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주머니의 호통에 지지 않고 말대꾸를 태연히 하고 꾸지람을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렇다고 민석이가 아이들을 무분별하게 괴롭히지는 않았다. 새끼 호랑이와 토끼가 함께 자라면 호랑이가 다 크고 나서도 토끼를 잡아먹지 않듯이 동네 아이들은 때리지 않았다. 아이들을 이끌고 놀이를 주도하였다. 싸움을 잘하고 우두머리 성향이 강하니 아이들도 민석을 잘 따랐다.

민석에 비해 한창 어린 영철은 그런 민석이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자신을 때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철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은 형 동생의 관계가 모호했다.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 점점 머리가 굵어진 동네 아이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사정이 달랐지만 영철이가 속한 연령대의 아이들 사이엔 형이란 존칭이 없었다.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화내는 아이도 없었다. 그렇다고 위아래 없는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형의 개념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개념이 빛을 발하는 때는 자신들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지면 질수록 무리를 이끄는 아이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한 살 차이는 키가 더 크고 덩치가 컸으니, 본능적으로 따르는 것이었다.

성호는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쭈쭈바를 빨았다. 영철은 이미 쭈쭈바 껍질을 버린 뒤였다. 성호가 침까지 섞어가며 빨아먹는 모습이 더러워 보였다. “어데 가노?” 성호가 미련 없이 쭈쭈바 껍질을 땅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담배심부름.” 규민이었다. 규민의 엄마는 다방 마담이었다. 심심하던 아이들은 모두 규민이가 언제 나올지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있었다. 언어장애인 아저씨는 여전히 아랫입술을 한껏 내민 채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규민이가 담배를 손에 쥐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백 원, 심부름 값이다.” 규민이가 지폐 오백 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부러운 듯 탄성을 질렀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규민이는 왼손잡이였다. 사실 동네 우두머리인 민석이도 왼손잡이지만 투수를 할 때만 왼손으로 던졌다. 그에 비해 규민이는 완전 왼손잡이였다. 규민이도 공을 곧잘 던졌지만, 힘이 없었다. 여자애 같은 머릿결을 지닌 규민이는 다른 동네 아이들과의 시합에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중학생이 주축인 동네대표팀에서 곱다란 외모의 규민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핸디캡도 붙어있었다.

“깐돌이다.” 영철의 말에 모두의 눈이 깐돌이에게 쏠렸다. 푸시시한 머리의 깐돌이 를 여동생인 깐순이가 쫓고 있었다. 누가 별명을 붙여주었는지 모른다. 깐돌이의 본명도 아이들은 모른다. 깐돌이 옆에는 항상 여동생이 있었다. 아이들이 많이 사 먹던 하드를 깐돌이는 여동생과 항상 나눠 먹었다. 하나씩 나눠 먹는 오누이의 모습에 별명이 그렇게 지어졌을 것이다. 깐돌이의 엄마는 대폿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점심을 넘긴 태양은 돌계단 위에도 내리쬐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늘진 쪽으로 궁둥이를 옮겼다. “우리 석유 찾으러 갈래?” 성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정확히 석유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어디에 있는지 아이들은 몰랐다. 웅덩이 같은 늪지대에 고여 있을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석유를 찾으면 우리나라는 부자가 된다고 했다. 그때 만식이가 아이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악수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저 다가가서 옆에 앉거나 서서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동네 아이들의 인사였다.

“우리 이만수 선수 사인 받으러 갈래?” “이만수?” “그래 이만수.” 만식이가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꾀송거렸다. 영철은 이만수가 누군지 몰랐다. 만식이가 말한 프로야구선수 이만수가 아니라 TV에 나오는 가수 이만수를 떠올렸다.

영철의 손에는 야구글러브가 쥐어져 있었다. 사인받으려면 야구글러브에 받으면 좋다고 누군가 말했고 영철은 떠밀리다시피 하여 자기 글러브를 집에서 가져오게 되었다. 여전히 이만수가 누군지 모른 상태로 어렴풋이 아이들의 대화에서 이만수의 사인을 받으면 좋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이 말하는 프로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다시 모였을 때는 규민이도 있었다. 왼손에 글러브를 끼고 있었다. 이만수 선수 사인을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가 퍼졌는지 택규도 다가왔다. 택규는 좀처럼 마음 놓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택규의 동생은 장애아였다. 영철의 눈에 비친 택규의 동생은 늘 반쯤 열린 입 사이로 침을 길게 흘리고 다녔다. 택규의 동생은 언어장애인은 아니었지만, 또래 아이들만큼 또렷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 택규가 무리에 끼었지만, 아이들은 그가 과연 끝까지 동행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택규와 그의 동생을 따돌린 건 아니었다. 성호는 택규가 동생 때문에 우리 노는데 방해가 될까 봐 빠진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착한 아이라고 감상 어린 말을 늘어놓았다.

아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언덕으로 향했다. 언어장애인 아저씨는 여전히 어정대고 있었고 몇몇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깐돌이가 깐순이를 따돌리고 무리에 끼었다. 언덕을 넘을 때쯤 택규의 동생이 골목에서 나왔다. 왼쪽 가슴엔 하얀 손수건이 달려있었다. 택규의 동생은 길게 침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제는 실랑이를 벌였다. “히야 이만수 사인 받아 오께.” “으응.” “잠깐만 있어라, 금방 갔다 온다.” “으응.” 동생의 응석은 점점 더 커졌다. 아이들은 난감해하며 형제를 에워싼 채 서있었다. 택규의 손목을 거머쥔 동생은 우악살스럽게 형을 골목 안으로 잡아끌며 악악거렸다. 침은 더 많이 흐르고 있었다. 택규의 얼굴은 불그죽죽해졌다. “에이! 안 되겠다. 너거들끼리 갔다 온나.” 아이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성호가 나섰다. “택규야 내가 대신 사인 받아 주께. 종이 도.” “진짜가?” “그래, 같이 받으면 되지.” 성호가 택규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았다. 사태를 파악한 택규의 동생은 더 이상 형을 잡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시 출발할 무렵 언제 나왔는지 한철이가 끼어 있었다. “서, 서, 성호야 나, 나, 나도 가도 되나?” 성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한철은 손을 배배 꼬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니 인마 이만수가 누군 줄 아나?” 성호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이만수?” 한철은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 안다.” “누군데?” 왼손잡이 규민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가, 가 가수.” 아이들은 모두 웃었다. 영철도 한참을 비웃었다. 야구선수 이만수를 알게 된 건 오늘이지만 말이다.

“그래, 가자, 인마.” 성호의 말에 한철은 금세 미소를 흘렸다. 한철은 말투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어수룩하고 행동은 갱충쩍었다. 말을 더듬고 달리기를 할 때는 손가락을 오물거리며 제대로 뛰지 못했다. 그런 한철이가 싸움을 잘할 리는 없었다. 덩치가 있고 키도 크지만 싸움을 못 한다는 건 동네 아이들이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욕은 잘하는 편이다. 욕설이 오히려 위협적일 때도 있었다. 특히 한철을 모르는 다른 동네 아이들에겐 잘 먹혀들어 갔다. 규민이는 야구공을 통통 튕기며 글러브로 잡아챘다. 만식과 야구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걸어갔다. 영철은 야구글러브를 가슴팍에 감싸 쥐었다. 성호와 한철 그리고 깐돌이는 사인받을 종이를 준비해 왔다.

“우리 납작만두 사 물래?” 규민이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니 돈 있나?” “어 있다. 아까 담배 심부름했잖아.” “무, 묵자.” 한철이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납작만두는 아저씨의 능숙한 손놀림에 뒤집어졌다. 기름을 두르고 알맞게 구워지는 납작만두. 영철은 납작만두를 굽는 아저씨가 매일 아침 TV에 등장하는 요리사 아줌마처럼 느껴졌다. 알맞게 구워진 납작만두는 납작만두만큼이나 얇은 접시에 담겨 아이들 앞에 놓였다. 간장을 뿌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젓가락 역시 접시만큼이나 오래되고 얄따란 것이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영철에게도 한입 돌아왔다. 씹을 것도 없이 만두는 입안에서 녹았다. 성호는 접시에 남은 간장을 마셨다. 영철의 눈에는 짜게만 보였는데 접시를 비운 성호는 만족한 듯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동네 아이들은 두류산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을 걸었다. 한낮의 더위에 영철의 이마에 땀이 오종종하게 맺혔고 한철은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았다. 길을 잘 아는 만식이지만 두류야구장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없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아이들은 땅골 연못으로 곧잘 개구리를 잡으러 가곤 했다. 두류산은 친숙한 곳이었다. 물론 산 전체가 놀이터는 아니어서 그들이 주로 노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돌을 쌓아 본부를 짓고 솔방울을 모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야 우리 일로 가자.” “어데로?” “절벽으로.” 규민이가 절벽을 가리켰고 만식은 이미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안 된다.” 깐돌이가 콧물을 흘리며 난감해했다. 동갑내기인 영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거는 글로 가라 우리는 이쪽으로 갈 끼다.” 성호는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만식과 규민은 절벽을 반 가까이 오르고 있었다.

“우아! 여기 동굴 있다.” 만식은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진짜가?” “그래, 여기 동굴이다.” 규민이가 대답했다. “맞나?” 영철은 앞서 걷고 있던 성호에게 물었다. “아이다, 뻥이다.” 영철은 성호의 말에 더 신뢰가 갔다.

아카시아 꽃향기를 한껏 품은 산들바람이 아이들의 코를 간질이고 강아지풀들을 더펄거리게 했다. “나, 나, 나,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병아리 떼 개떼들 이리 날아오너라.” 한철은 바람에 떠다니는 나비를 쫓으며 홍알거렸다.

“너거 그 이야기 아나?” “무슨 얘기?” 성호가 규민을 바라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옛날에 중국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이 하루는 꿈을 꿨어.” “그래서?” 깐돌이가 재우쳤다. 한철은 여전히 나비를 따라다니며 나비가 내려앉기를 바라고 있었다. “꿈에서 그 사람이 나비로 변한 거야.” “나비 꿈이네.” 깐돌이가 말했다. “근데 그 사람이 깨어나서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면서 그랬단다.” “뭐라카노?” 언제 다가왔는지 한철이가 입술을 실쭉거리며 내뱉었다. “나비가 나인지 자기가 나비인지 모르겠다고…” 영철은 알쏭알쏭한 이야기를 곱씹었다.

한철은 들꽃에 내려앉은 나비를 잡기 위해 살금살금 다가서고 있었다. “나비 잡은 손으로 눈 비비면 눈 봉사 된다.” 만식의 말이 겁나는지 한철은 무춤했다. “누, 눈 안 비비면 되지.” 한철은 나비 날개를 잡으려고 손을 천천히 뻗었다. 한철이가 잡으려는 순간 나비는 들꽃을 하느작거리며 날아올랐다. 한철은 아쉬워했다. 아이들은 모두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한철은 손을 안으로 말아 쥐고 매끄럽지 못한 동작으로 아이들 곁으로 뛰어갔다.

아이들은 두류산 정상 쪽으로 가지 않았다 경사진 언덕길보다는 야트막한 구릉을 넘어 야구장으로 가는 게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리상으로는 조금 멀지만 걷기 편한 오솔길을 택했다.

“와! 이거 봐라, 방아깨비다.” 깐돌이의 손엔 방아깨비의 뒷다리가 쥐어져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방아깨비는 깝신깝신 제 몸을 흔들었다.

“우리 풍뎅이 잡으까?” “그래 잡자. 저기 풍뎅이 본부 아이가?” 방아깨비를 건네받으려던 한철이가 말했다. “아이다! 오늘은 풍뎅이 잡을 때가 아이다. 이만수 사인 받아야지.” “그래 풍뎅이는 나중에 돌아올 때 잡자.” 성호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이만수가 누군데?” 영철이가 만식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야구선순데 잘한다.” 만식의 대답은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철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만식이가 이만수를 제대로 알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영철은 이만수도 처음이고 누군가에게 사인을 받는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미루나무군락지를 지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풍뎅이 본부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었다. “미루나무꼭대기에 한철이 빤스가 걸려있네. 한철이 엄마 올라가서 냄새 맡고 기절했데요.” 규민의 노래에 아이들이 깔깔댔다. 한철은 들리지 않는 척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미루나무꼭대기에 규민이 빤스가 걸려있네. 규민이 누나 올라가서 냄새 맡고 기절했데요.” 이번에는 만식이가 노래했다. 규민은 기분이 나쁜지 야구공을 만식에게 힘껏 던지려 했다. “엄마아, 엄마아, 깐돌이 집에 돼지 불알 삶더라. 좀 주드나? 안주더라. 찌찌 찌릉내 나더라.”

소담스럽던 아카시아꽃이 바람에 사락사락 날려갔다. 성호가 꿀을 먹기 위해 탐스러운 놈으로 골라 땄다. 포도송이 삼키듯 입안 가득 아카시아꽃을 넣었다. 아이들은 성호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퉤, 퉤, 아이! 이제 못 먹겠다.” 한철은 아카시아꽃 한 다발을 손에 쥔 채 걷고 있었다. 규민은 메뚜기를 잡아 한철에게 다가갔다. “사마귀다.” “엄마야!” 사마귀를 무서워하는 한철은 아카시아를 내던지고 뒤뚱대며 도망쳤다.

영철은 아이들을 뒤따랐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저 따라가는 것이다. 아이들과 떨어지지 않고 잘 따라다니면 별문제 없이 귀가 하지만 영철은 아이들을 놓친 적도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두류야구장으로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영철은 그때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 형들의 야구시합을 구경하고 있었으리라.

두류야구장에는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갈 때 발생했다. 영철은 동네 아이들의 행방을 놓쳐버렸다. 두류야구장은 출입문이 모두 닫혀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아이들이 펜스를 뛰어 내려와 놀았다. 영철은 울먹거리며 에둘러쳐져 있는 펜스를 따라 야구장을 몇 바퀴 돌았다. 동네 아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모두 낯선 아이들뿐이었다. 어린 영철에겐 펜스가 너무 높았다.

그때 낯선 형이 다가왔다. 울면서 헤매고 있는 영철을 지켜보았으리라. “니 담 못 넘어가재?” 낯선 형이 다가와 영철에게 물어보자, 경계와 구원의 눈빛으로 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형은 영철을 이끌고 펜스로 다가갔고 세워둔 자전거를 밟고 올라서도록 잡아주었다. 영철은 감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처럼 기뻤다. 영철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는 고맙습니다, 라고 한다는 걸 배운 적이 없었다. 영철은 뒤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영철은 동네 아이들을 따랐다.

“대학교소사 달리기 존나 잘 한데이. 내 잡힐 뻔 했다아이가.” “그래 나도 겨우 도망쳤다.” 만식이가 성호의 말에 맞장구쳤다. “나는 안 잡더라.” 영철은 힘없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일요일이면 대명동 한사대학으로 야구하러 갔다. 중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야구했다. 골목에서의 야구보다 넓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던지고 치고 달리기위해서.

아이들의 놀이에 훼방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수위였다. 들어갈 때부터 아이들은 대학 담벼락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니 도망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사다.” 누군가 외치면 저마다 정문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구두를 신은 수위도 달리는 게 즐거운지 아이들과 시합이라도 하듯 뒤를 쫓았다. 그리고 수위는 영철을 앞질러 내달렸다. 영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서 도망가는 덩치 큰 중학생들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때 영철은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 깍두기라는 것을.

양떼구름이 드높게 하늘에 걸쳐져 있었다. 굼실굼실 양떼들이 풀을 찾아 흐르고 있었다. 햇살은 노곤함을 넘어 조금 덥게 느껴졌다. “물 먹고 싶다.” “나도.” 영철이와 깐돌이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갈증을 호소했다. “야구장에 가면 수돗물 나온다. 조금만 참아라.” “우리 야구공 훔칠래?” “무슨 야구공?” 규민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만식의 옆으로 다가왔다. “선수들이 쓰는 공.” “어떻게 훔치는데?” 이번에는 성호도 관심을 보였다. “뭐 볼 보이처럼 야구장 구석에 떨어진 야구공 들고 튀는 거지.” “선수들 쓰는 공은 좋나?” 깐돌이가 물었다. “억발로 좋다.” 영철은 자기 글러브에 공을 주워 담는 상상을 했다. 야구공이 좋아서가 아니라 뭔가를 가져온다는 것, 그것이 훔치는 것이라면 짜릿할 것 같았다.

규민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이들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깐돌이도 아버지가 없었다. 영철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서로의 부모에 대해 잘 몰랐다. 해거름 녘에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곧 우리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머지않아 누군가 자 이제 오늘 그만 놀자든가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 놀이는 여름철이면 저녁밥을 먹고 나서도 이어졌다. 가로등 불 아래 모여들어 탈출이나 얼음땡, 숨바꼭질을 했다. 중간중간 귀신 이야기가 섞일 때도 있었다.

“지금 몇 시고?” 성호가 물었다. 손목시계를 찬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만식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시나 4시.” 한철은 왼손에 침을 뱉고는 오른손으로 내리쳤다. 침은 제대로 튕겨 나가지 않았다. 한철은 침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늦은 건 아니겠제?” “아이다.” 성호의 물음에 만식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규민은 야구공을 깐돌이와 영철에게 패스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두류야구장엔 다른 동네에서 온 아이들도 많았다. 그들이 모두 이만수 사인을 받기 위해 모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선수들은 만식의 예상대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야구장 여기저기서 선수들의 짐승 같은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외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었다. 규민은 어디 공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야구장 곳곳을 살폈다. 만식도 마찬가지였다. 선수대기석에는 배트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꽂혀있었다. 흙먼지 날리며 선수들은 뛰고 공을 받았다. 아이들은 관중석에 앉아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만식과 규민이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언제 자리를 비웠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다 뛰어오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얘들아! 도망가자.” 아이들은 이유를 물어 볼 겨를도 없이 놀란 규민과 만식의 눈빛에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새끼들아, 잡히면 죽는데이.” 뒤돌아보니 중학생으로 보이는 덩치 큰 아이들이 야구 배트를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모른 채 야구장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몸을 숨기고 우악살스럽게 생긴 녀석들이 여전히 뒤쫓아 오고 있는지 살폈다.

“전마들 누군데?” 숨을 가다듬고 성호가 물었다. “몰라 시발놈들, 아마 땅골에 사는 새끼들일 끼다.” “와? 와 따라오고 지랄이고?” “시발놈들! 우리가 공 주우려니까 자기들끼라고 지랄하데.” 성호는 당황스러웠다. 맞붙어 싸우기에는 덩치들이 컸고 머릿수도 많았다. “전마들 들고 있는 배트 봤나? 대가리 움푹 들어간 거 그거 선수용 배트 아이가. 전마들이 다 훔쳤을 끼다.” 규민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모두들 겁에 질려있었다. “에이 시발, 민석에만 있었으면 다 죽었는데….” 성호가 종주먹을 쥔 채 아쉬워했다. “전마들 깡패 아이가?” “그렇지 싶다. 시발놈들 존나 무식하게 생겼더라.” “그래 땅골에 사는 놈들이다. 시발놈들 글러브하고 공하고 야구방망이하고 다 훔쳤다.” “아! 이러다가 우리 이만수 사인 못 받는거 아이가?” 만식이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래도 이제 안 쫓아오네.” “여, 좀 더 숨어있자.” “그래, 여 있다가 선수들 버스 타면 그때 사인받자.” 아이들은 고시랑고시랑 댈 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영철은 민석이가 나서서 쫓아오던 놈들을 때려눕히는 상상을 했다. 아이들은 야구장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선수들을 지켜봤다. 훈련이 끝났는지 홈플레이트로 선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우리도 저쪽으로 가자.” 만식의 말에 모두들 따랐다. “따, 따, 땅골놈들 있으면 우짜지.” 아이들은 흘금흘금 주위를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선수단 버스로 향했다. 선수들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한 명씩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야구장에 있던 아이들이 선수단 버스로 몰려들었다. 영철의 눈에 선수단 버스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버스였다. 선수들은 작은 병에든 코카콜라를 마셨다. 코카콜라로 입안을 헹구고 버스창 밖으로 뱉어내는 선수도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이만수 선수가 앉아있는 버스창 문으로 몰려들었다.

영철에게는 그 광경이 복잡하게만 보였다. 몰려드는 아이들도 그랬고 왜 이만수 선수 사인을 받아야 하는지, 그 순간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밀려드는 아이들 틈에서 겁이 났다. 영철은 야구글러브를 들고 선수단 버스를 한 바퀴 돌았다. 영철은 멈춰서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뒷좌석에 앉은 선수가 뭐라고 앞 선수에게 이야기하자 앞에 앉은 선수는 환하게 웃으며 버스 창문을 열었다. 영철은 다음 동작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인받는 다른 아이들을 보고 배웠다. 영철은 두 손으로 야구글러브를 올려줬고 누군지 모르는 선수는 글러브를 건네받았다. 사인은 금방 끝났다. 글러브를 돌려받은 영철은 동네 아이들이 있는 버스 반대편으로 갔다. 영철의 글러브에 손 상득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만수의 사인을 받았고 모두들 웃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나 손상득 사인받았다.” 만식이가 영철의 글러브를 들여다봤다. “잘했다. 손상득도 잘한다.” “맞나?” “어, 포순데 잘한다.” 만식의 말에 영철은 비로소 안심되었다. 이 만수 선수 사인을 받지 못해 아쉬운 건 아니었지만 손 상득 선수도 잘한다는 말에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은 전리품을 획득한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행히 그들을 쫓아왔던 땅골 아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은 두런두런 말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길을 걸었다. 아이들은 허청거리며 걸었다. 지친 분위기를 잘 아는 성호는 아이들을 다독였다.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다.” 한철은 돌아오는 길에도 노래를 불렀지만 흥이 없었다. 무덤을 지나고 복숭아밭을 지나쳤다. 아무도 귀신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손에 꼭 쥔 이만수 선수의 사인을 들여다보며 힘을 내고 있었다. 돌아가면 동네 아이들에게 무지하게 자랑할 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중학생 형들도 부러워할 만큼 값진 사인이라는 것을 성호와 만식은 잘 알고 있었다.

“우, 우리 풍뎅이 안 잡나?” 한철의 말에 모두 걸음을 멈췄다. “풍뎅이 본부 지나왔잖아.” “그래, 풍뎅이는 내일 잡자.” 성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 지, 진짜재? 내일 올끼재? 약속.” 한철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성호는 마지못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간장 풍뎅이는 똥냄새 난다.” 깐돌이가 코를 찡긋대며 말했다. “그래 금 풍뎅이가 제일 좋다.” 만식이가 깐돌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리바리한 한철은 풍뎅이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했다. 풍뎅이가 한철에게로 날아올 것 같으면 무서워 피하면서도 뒷다리에 실을 매달아 날리기를 좋아했다. 풍뎅이를 키우겠다며 설탕물을 만들어 먹였다. 유리컵 속 풍뎅이는 이빨을 오물거리며 설탕물을 먹었다. 고물고물 움직이는 풍뎅이를 어린아이들이 모여들어 신기한 듯 구경했다.

“아! 맞다. 택규 사인 안 받았다.” 성호가 풍뎅이 나무에서 생각난 듯 발을 구르며 아쉬워했다. “진짜가 우야노?” “뭐 할 수 있나, 까먹었다 캐라.” 만식이가 거들었다. “에이! 바보 같이.” 성호는 이만수의 사인을 바라보며 자책했다.

아이들로 빽빽하던 문방구들은 한산했다. 납작만두를 파는 아저씨의 리어카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이사 간다.” “언제?” “몰라.” “야들아! 깐돌이 이사 간단다.” 성호가 큰소리로 아이들에게 알렸다. “어데로 가는데?” “반고개.” 아이들은 하나로 뭉쳐 걷고 있었다. 한철과 규민은 눈길도 주지 않고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사 가면 놀러 온나.” “응.” 아이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성호는 반고개에 술집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기에 좋은 동네는 아니었다. 깐돌이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시무룩했다. 깐돌이는 엄마가 대폿집보다 차라리 규민이 엄마처럼 다방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걸리 냄새보다는 커피 냄새가 좋았으며 손님들의 담배심부름으로 용돈을 챙기는 규민이가 부러웠다. 깐돌이에게 손님들 담배심부름으로 돌아오는 건 “자, 니도 대포 한 잔 할래?” 불그죽죽한 취객의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뿐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동네 언덕에 도착했다. 규민은 다시 힘이 나는지 담벼락에 야구공을 튕겨가며 걸었다. 동네 언덕을 넘어 내리막으로 내려섰다.

“엄마.” 골목에 나와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엄마에게 한철은 뛰어갔다. “너거들 어데 갔다 오노?” “이만수사인 받고 왔어예.” “이만수?” 한철의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철아! 가자, 저녁 먹을 때 다됐다.” 한철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한철아 가재이.” 규민이가 인사를 건네자 실뚱머룩했던 한철은 배시시 웃었다. 숲에서 싸운 뒤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서름서름했던 한철과 규민이었다. 한철은 엄마와 함께 골목 끝에 자리한 녹색 대문으로 들어갔다. 이만수의 사인을 꼭 쥐고서.

다음 골목에 택규의 동생이 청처짐하게 서있었다. 성호가 다가갔다. “니 형 어데 갔노?” 택규의 동생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설명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듯 보였다. 턱밑으로 길게 침이 흐르고 있었다. “이거, 니 형한테 줘라.” 성호는 자신의 이만수 사인을 건네줬다. 종이를 받아 든 택규의 동생은 기분이 한결 좋아 보였다. 영철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구멍가게 옆 돌계단에는 동네 아이 서너 명이 앉아있었다. “이만수 사인 받았다.” 규민은 큰소리로 자랑하기 시작했다. 언어장애인 아저씨가 음, 음 소리를 내며 자기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영철은 집 앞에 다다랐다. 야구글러브엔 손상득의 사인이 있었다. 크게 기쁘지도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이만수의 사인을 받지 못해 아쉽지도 않았다. 이만수의 얼굴을 보았는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만수의 사인을 받기 위해 버스에 모여든 수많은 아이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사인을 해주던 손상득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 이제 가자” 큰아들이 영철에게 다가왔다. “아빠 배고프다. 뭐 사 먹자.” 동생이 뛰어오며 말했다. “아빠! 내가 나비 잡았는데 날아가 버렸다.” 막내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검지와 엄지손가락에는 나비의 비늘 가루가 햇볕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엄마다.” 두 아들은 엄마에게 달려갔다. 영철은 아내와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타워를 올려다보았다. 타워를 넘어 시공간의 초월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 아내와 두 아들에게 뛰어갔다.

강현길

△약력
동아백화점 수필공모전 장려상
2016년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수필공모전 장려상
△수상소감
해마다 열리는 경북일보 문학의 장에 이런저런 핑계로 참여하지 못하고 부러워만 했습니다. 올해는 반드시 잔치에 가겠다고 다짐했는데 현실의 번잡스러움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을 놓았습니다. 어렵사리 참여하였고 수상까지 하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게으르고 느려터진 저의 문학 여정에 힘내라고 물 한 잔 얻어 마시는 기분입니다. 심사위원분들과 경북일보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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