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청송객주문학대전
노란 M자가 박힌 출입문을 열고 나는 종업원부터 살핀다. 점심시간을 맞은 종업원은 지금 한창 바쁘다. 식당 안에는 앉을 자리조차 없이 손님으로 꽉 찼다. 나는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고 웃옷을 벗어서 재빠르게 윗몸을 씻는다. 옷은 물비누를 묻혀 대충이라도 빤다. 냄새를 지워야 그나마 노숙인의 티를 감출 수 있다. 그렇게 빤 티셔츠는 땡볕에 나가면 금방 마를 것이다. 처음엔 업주나 종업원에게 쫓겨난 적도 있다. 이제는 쫓겨날 만한 곳을 피해 눈치껏 볼일을 본다. 그리고 바야흐로 출근한다. 카지노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원의 눈을 피한다. 들어설 때마다 뚫어지게 꼬나보는 꼴이 기분도 나쁘고 뒤따르는 눈길에 뒤통수가 뜨끔하기도 하다.
카지노 안은 탄식과 환호의 열기로 가득하다. 슬롯머신의 스크린에서 릴이 돌면서 변하는 색상들이 춤을 추듯 번뜩인다.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머신의 전자음에 실내는 설렘과 흥분으로 들떠 있다. 나는 그들의 옆을 지나 ‘꾼’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은 베팅 액이 비교적 높은 곳이다. 나는 주변을 살핀다. 어수룩한 초짜는 금방 표시가 난다. 그런 사람을 골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경꾼인 양 게임을 지켜본다. 자잘하게 터지는 곳도 있지만 터질 듯 터질 듯 터지지 않는 곳이 더 많다. 끈질기게 앉아서 끙끙거리다가 결국 손을 털고 일어나는 사람은 대부분 아시아계의 늙수그레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손을 털고 일어난 자리가 그나마 터질 확률이 있는 곳이다. 슬롯머신에서는 잘 터지는 시간과 터지지 않는 시간의 비율이 대체로 1:5 정도이다. 자잘한 게 터지는 비율이 1이라면 잘 터지지 않는 비율이 5 정도라는 걸 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잘 터지지 않는 타이밍이라 해도 카지노란 어떤 곳인가. 도박 심리를 지능적으로 이용하여 겜블러를 애간장 태워 지갑을 털어 내는 곳이 아닌가. 이 흐름을 모르는 초짜들은 영락없이 낚인다. 그래도 의외로 좀 큰 게 터질 때도 있다. 알 수 없는 것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초짜에게 이런 게 잘 터진다는 것이다. 저 위의 상황실에서 이 모습을 시시티브이로 지켜보고 있다가 의도적으로 기계를 조작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기계는 이미 정해진 매뉴얼 대로만 움직인다. 조심해야 한다. 어쩌다 행운을 맞은 초짜 중에 그게 낚싯바늘이 되어 인생을 망친 사람이 부지기수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으니까.
카지노 업체 슬롯머신의 수입 중 70%는 고객에게 배당되고 30%가 업체의 수입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기계에는 랜덤 넘버 제너레이터 (RNG)라는 정부 관련 기관의 칩이 내장되어 있어 업체 임의대로 조작할 수 없다. 기계에서는 반드시 70%에 해당하는 액수가 부분적이거나 잭팟 이거나 간에 나오게 되어있다. 어떤 것은 오랫동안 내장된 70%의 배당액이 소급되어 나올 때도 있다.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정부 기관의 매뉴얼이다. 그 매뉴얼의 비율대로라면 게이머가 손을 털고 일어난 자리에서 터질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게이머가 손 털고 일어난 자리에 의자를 뒤로 밀어붙여 누군가가 게임 중이라는 표식을 해놓고 그 자리를 확보해 둔다. 미리 물색해 두었던 어리벙벙해 보이는 초짜에게 다가가 틀림없는 곳이 있다고 꼬인다. 대부분 무시하곤 하지만 솔깃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을 데리고 가 그 자리에 앉힌다. 잘되면 좀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그 말도 잊지 않는다.
예전에 마켓을 운영할 때 새벽장 보러 간 도매상에서 마주치던 얼굴을 카지노 안에서 마주칠 때가 있다. 뜨끔해진 나는 수단껏 나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래도 얼굴을 딱 마주치게 되면 달리 도리가 없다. 아, 예예. 오랜만입니다. 그들은 행색이나 비굴하리만치 어눌한 나의 말투를 보고 금방 눈치를 챈다. 어떤 이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고, 어떤 이는 딱한 표정을 지으며 푼돈을 건네기도 했다. 자존심 따위는 내게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어도 이때만큼은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이 인다. 그것도 잠시, 어느 때부터 안면 있는 사람이 보이면 스스로 다가가는 나를 보았다.
그런 어느 날 미셸의 친구를 발견하고 서둘러 숨었던 일은 나를 오랫동안 아프게 했다. 이미 나를 버린 나도, 미셸에게만큼은 이런 모습이 알려지는 게 싫었다.
미셸은 미국에 와서 처음 만난 여자였다.
이곳의 물정을 몰라 한창 헤맬 때 교회 성가대에서 만난 여성이었다. 스물아홉 살 동갑내기인 미셸과는 교회에서 서로 이물 없이 지냈다. 미셸은 갓 이혼한 눈물 많은 시기였고, 나는 나대로 낯선 땅에서 한창 허둥거릴 때였다. 서로 막막하고 캄캄한 시기였으니 우연히 손끝이 스치거나 눈빛이 스쳐도 번개의 울림으로 다가서던 가슴들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미셸과 함께한 3년이라는 그 세월이 내가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내 인생의 봄날이었다. 그것도 잠시, 우리에게도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다. 미셸은 이혼녀라는 멍에를 안고 있었고, 나는 곧 이곳으로 오게 될 서슬 퍼런 어머니의 눈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각자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돌덩어리였다. 때맞추어 미셸과의 사이를 간파한 한국의 누나는 서둘러 안양에 산다는 졸부의 딸을 내 앞에 부려놓았다.
“부모님이 오실 때가 됐잖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너를 보며, 내가 누굴 믿고 자신 있게 나서겠어. 나는 부모님을 뵐 자신이 없으니 우리 인제 그만 만나.”
나의 방황을 꿰뚫어 보고 있는 미셸의 말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젖어 있는 목소리를 감추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혼녀를 반갑게 맞아 줄 리 없는 어머니보다, 가난한 미셸과 나 사이에 서로 등이 되어주지 못하는 처지를 먼저 생각했다. 무능한 내게서 더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 그런 말로 변명의 구실로 삼은 건 졸부의 딸이라는 안양 처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구사하지 못했을 나의 문법이었다.
나는 내 모국에서 이루지 못한 내 욕망을 기회의 땅이라는 이곳을 믿고 왔었다. 안양 처녀가 눈에 들어오자, 사랑과 욕망은 또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란 다 변형된 자기애가 아닐지 싶었다.
나는 수시로 카지노를 옮겨 다닌다. 샌디에이고나 팜스프링, 때로는 멀리 라스베이거스까지 갈 때도 있다. 옮겨 다니는 곳마다 이미 거래를 튼 몇 명이 보인다. 어떤 곳에서는 나를 찾아다니느라 두리번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푼돈이 생기면 다시 나의 운을 걸어 본다. 되는가 싶다가 결국은 다 쑤셔 박고 만다. 퀭한 눈으로 거리에 쳐놓은 텐트로 돌아온 나는 언젠가는 기어이 한 번 터지리라 굳게 믿으며 값싼 보드카를 입에 쏟아붓고 또 꿈을 꾼다.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생각이 길면 삶은 재미없어진다. 생각에는 길이 없다. 길이 없으니 닿는 곳 또한 있을 리 없다.
나는 지금 어디에도 메이지 않는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아무도 나를 괴롭히거나 간섭하는 사람도 없다. 꿈도 있다. 모두가 미친놈이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벼락을 맞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확률적으로는 가능성이 없지만, 내가 믿는 건 그 확률이 아니라 타고난 나의 운명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그래도 꿈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나를 지탱해 주는 동력이다.
카지노 안에는 나와 같은 삐끼들이 자주 눈에 띈다. 척 보면 안다. 그들이나 나나, 알아도 아는 체하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 숨기고 싶은 사연 때문일 것이다. 삐끼로 사는 우리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 건 가리지 않는다. 사람 죽이는 일 빼놓고는 다 한다. 대부분의 삐끼도 처음부터 삐끼였던 건 아니다. 대체로 이곳에 들렸다가 낚시에 걸린 사람들이다. 돈을 찾는 촉이 매우 발달한 이들이라도 카지노 내에서는 사고를 치진 않는다. 그건 서로 삶의 터전을 보호하려는 묵계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도 이 층 어디쯤의 상황실에서는 수백 개의 카메라로 사소한 행동까지도 모니터링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카지노 주변에 어수룩한 사람을 노리는 불량 사채꾼에게 돈을 빌린 적도 있다. 기한이 만료된 채무자로 변신한 나는 그들을 피해 다니다 잡혀서 몰매도 맞았다.
“누울 만한 크기로 파!”
도망 다니다 잡혀서 깊은 밤의 모하비 사막 데스밸리, 말 그대로 죽음의 사막에 끌려가 끔찍한 협박도 받았다. 어떤 식으로든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공포심이었다. 엘에이에서 불과 서너 시간만 가면 광활하게 펼쳐지는 모하비 사막, 그 모래 밑에는 많은 뼈다귀가 울고 있을 것이다.
한때는 우리 집이었고 나의 아내였던 사람이 사는 집에 무단 침입했다. 좋은 시절 아내에게 사 주었던 반지를 훔쳤다. 콩알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받고 아내는 내 목에 팔을 두르고 품에 안겨들던 반지였다.
*
나에게도 잠시였지만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엘에이에 흑인 폭동이 났을 때 나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밤새워 가게를 지켰다. 폭도들이 유리창 안으로 화염병을 던지면 준비하고 있던 호숫물로 불을 껐고, 공중으로 총을 쏘면 나도 총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맞대응했다. 사생결단으로 지킨 덕에 주변 상가가 모두 불타버렸어도 내 리커 스토아는 용케 타다가 말았다. 발 빠르게 가게를 수리하고 주변에 타다만 가게 세 곳을 줍다시피 사들여 손 좀 봐서 번듯하게 해 놓은 게 주효했다.
폭동이 나기 몇 해 전 나는 졸부의 딸과 결혼했다. 안양 어딘가에서 대대로 포도밭을 경작했던 장인은 포도밭이 개발지로 바뀌자, 똥 밭이 금밭으로 변해 한순간에 졸부가 된 케이스였다. 리커스토아는 장인이 전액을 내놓아 마련했다.
경쟁이 없어진 가게는 무척 바빴다. 한참 신이 났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력으로 세워놓지 못한 기반은 사소한 바람에도 곧잘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가게가 붐빌수록 네 곳의 가게를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늘어난 가게를 맡길 가족이나 믿을만한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가게를 늘렸을 때 그걸 다 운영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키워서 권리금을 받고 처분할 생각이었다. 혼자서 네 곳의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막상 매상이 절정에 올라 지금이 팔 때라고 하자 아내는 펄쩍 뛰었다. 비즈니스가 뭔지도 모른다고 내게 툴툴거렸다. 죽어가는 업소를 싼값에 사들여 잘 키워서 되팔 때 챙기는 이익금이야말로 알짜라는 것을 아내는 몰랐던 건지, 알면서도 늘어나는 가게에 집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운영을 잘못해 죽어가는 가게가 주변에 많았다. 그러한 정황을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어도 아내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내는, 사업이란 잘될 때 조금씩 늘여가야지 줄여간다는 것은 오는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어서, 처음엔 나도 선뜻 넘기기엔 아까운 생각이 들어 버텨보려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몸이 부쳤다. 두 가게에 매니저를 고용해 운영해 보았지만, 표나게 줄어드는 매상액과 계산대 앞, 뒤로 시시티브이가 내리꽂혀도 옆으로 새는 돈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점심을 나르기 위해 가게에 들러 자잘한 일을 도왔던 아내는 내가 물건을 하러 간 사이 말이 통하지 않은 손님에게 오해로 빚어진 다툼이 있고부터 아예 가게에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 바람에 나는 잠시 숨을 돌릴 여유마저 잃어버렸다.
“아버지가 돈을 댄 건 사업을 잘해서 크게 일어나 보라는 뜻 아냐? 기껏 잡은 기회를 그렇게 처분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네 개나 되는 가게에 애착심이 강한 아내는 수시로 친정아버지를 들먹거려 내 생각을 사전에 차단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아내의 요지부동인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는 나는 부부간에도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는 걸 느꼈다. 간격이란 점점 더 벌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나는 우울했다.
가게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크고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쌓인 스트레스가 독초같이 자라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매장 창고에 *피냐타를 걸어놓고 수시로 나무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 흠씬 두들겨 맞은 피냐타의 몸이 갈라지고 찢어져 시뻘건 내용물이 뚝뚝 떨어질 때야,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막대기를 구석에 집어 던졌다.
아내는 매일 곤죽이 되어 집으로 오기 바쁘게 쓰러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장사를 오래 해온 사람이 그만하면 이력이 났으려니 막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일상이 되고부터 아내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젊은 열기를 식히지 못했던 아내가 식탁 위 와인병 옆에 팔을 괴고 자는 모습을 본 순간 우리가 맞이할 일들이 선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약간의 배려와 이해심만 있었다면 가능한 연출을 결국 우리는 못 하든지 하지를 않았다.
나로서도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묘안이 없었다. 세 가게를 처분하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게 하는 아내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나는 이 음울한 덫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러다가 정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길 때였다.
무언가가 잘 못 되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미셸이 생각났다. 그때마다 나는 미셸을 울린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승자박이라고 생각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무르고 싶었다.
아내는 더 늦기 전에 헤어지자고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선심 쓰듯 내민 자투리 두 가게의 소유권 증빙서류를 받아 들고 처음과 같은 가방 몇 개를 끌고 미련 없이 집을 나왔다.
애당초 ‘졸부의 딸’에 욕심을 냈던 건 사람이 아니라 ‘졸부’라는 꼬리에 따라붙는 수식어 때문이었던 걸 생각하면 아내를 성토할 입장도, 서운해할 것도 없었다. 대책 없는 순수성보다 현실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나로서는 그것이 가난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믿었다.
텅 빈 공허 속으로 미셸이 파고들 때마다 나는 내가 미웠다. 이혼은 내게 숨구멍을 터준 대신 욕망하던 것을 잃었고, 삶의 목표도 지워버렸다.
미셸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무슨 면목으로 그를 대하랴.
오래전 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활동한 미셸의 친구 전화번호를 어렵사리 알아내서 그간의 미셸 얘기를 들었다.
“이제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을 흔들지 말았으면 해요.”
적의를 품은 말투였다.
미셸은 충청도 어느 지방에서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중신으로 만난 재미사업가라는 사람에게 사기 결혼을 하고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었다. 시골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친정아버지의 퇴직금까지 날렸다. 미셸은 친정에 얼굴을 들 수 없어 거처도 알리지 않았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친구의 말을 들은 나는 더욱더 미셸을 만나고 싶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었다.
미셸을 만난 건 몇 번인가 남긴 보이스 메시지와 텍스트로 문자를 보낸 후였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미셸은 귀티가 나는 고급 의상을 두르고 있었다. 여성용 옷 가게를 한다더니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차림새를 보면 그때와는 달리 세련되어 보였다.
미셸은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주친 눈빛이 강렬해서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려야 했다.
“오랜만이네.”
미셸이 말했고 나는 여전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 보재며,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라도 한번 보고 싶었어.”
“참 공허한 울림이네.”
회한으로 가득 찬 까만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정말 할 말이 많았지만, 할 말이 없기도 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미안했다. 많이.”
미셸도 할 말이 많았겠지만, 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미안해할 것 없어. 그땐, 너두 막막했을 거니까. 다만, 그전에 우리가 좋았던 때 너에게 고백을 듣는 순간, 나는 그것이 진실이고 끝까지 갈 줄 알았어. 그것이 허망한 소리로만 덩그러니 빈방을 차지하고 있을 때, 참 오래 앓았어. 이제 그것도 다 지나간 얘기, 상처는 건들면 건들수록 성만 내잖아.”
미셸은 마침표도 찍지 않고 서둘러 나갔다. 나는 미셸의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용서를 빌고 싶었고 용서를 받고 싶었어. 할 수만 있다면,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어. 이제는 정말 잘할 것 같았거든.
두 곳의 가게를 서둘러 처분한 건 미셸을 만난 그 직후였다.
*
팍!
슬롯머신 스크린 속 릴이 돌다가 순서대로 열 배수를 의미하는 10타임, 10타임, 그리고 다른 10 타임의 심벌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두 개 옆에 멎는 잭팟이었다. 잭팟이 터지기 전 나는 이상하리만치 두 눈이 활활 타는 듯한 열기를 느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왔고 카지노 직원 몇 명이 다가와 축하한다고 손을 내밀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짝, 짝, 짝 손뼉을 치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텐트를 뒤흔드는 바람과 빗소리가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가 될 수 있다니. 나는 빗물에 젖은 옷가지 옆에 맥없이 무너졌다. 식은땀으로 흥건한 몸 위로 한기가 몰려왔고 기침이 쉼 없이 나왔다. 나오는 기침을 성질 것 뱉어냈다. 붉은 선혈이 튀어나올 때까지. 프리웨이 고가다리 옆, 키 작은 나무 몇 그루 서 있는 옆에 친 텐트에서였다.
현실인 양 여겨지던 도무지 꿈같지 않은 꿈이었다. 아, 이게 꿈이라니! 텐트 밖을 뛰쳐나온 나는 소리를 질러대었다. 소리는 멀리 가지 못하고 빗줄기에 걸려 무정한 꿈처럼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총이 있었다면, 그것도 기관총으로 두두두두, 드르륵드르륵, 어디에든 갈기고 싶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나는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꿈을 되새겨 보았다. 분위기며 릴이 돌아가던 상황이며, 세 개의 심벌이 아귀가 맞아들 듯 나란히 정지하던 모습이며.
꿈에서 잭팟 심벌 세 개를 눈여겨볼 때 눈에서 일던 강렬한 열기, 곧이어 터진 잭팟. 그것은 내게 일어날 예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맥시멈 배팅액이 높은 슬롯머신 근처를 배회하며 기계를 살펴보았다. 머신 위에는 최대 배당금이 전자 판에 찍혀 있고 게이머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배당금이 올라갔다.
그곳엔 이미 베팅 액을 맥시멈에 고정해 놓은 중년의 동양 여자가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전자 판에 돌아가는 배당 액수가 3백만 불을 넘어서고 있었다. 소급액이 많다는 건 그만큼 안 터진다는 말도 되지만, 정부의 관련 기관에서 발행한 칩대로라면 언젠가는 터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자는 통이 커 보였다. 최대 배팅 액수 한 번에 48불짜리였다. 그래서 그렇게 보였는지 여자에게는 있어 보이는 티가 났다. 얼굴에도, 옷차림에도. 한 번의 베팅 시간은 정확히 3초가 걸렸다. 나는 여자의 빈 옆자리에 앉았다. 게임을 한다기보다 옆에 여자가 하는 게임기의 릴이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기계는 정해진 시스템에 의해 버튼을 누르면 돌아가고 정해진 대로 멎을 것이었다. 저 시스템을 역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 나는 배팅액을 최소로 걸어놓고 천천히 버튼을 누르며 옆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자가 힐끗 나를 돌아다보았다. 여자의 스크린을 유심히 살피는 내가 불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여자가 눈을 흘기며 거칠게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났다. 잠시 앉아서 본 그 기계에서는 적은 것마저 터지질 않았다. 여자는 터지지 않는 스크린 앞에서 연신 불만을 토해내며 짜증을 냈었다. 나는 여자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지금쯤 배팅액을 올려봄 직했지만 내겐 여자처럼 맥시멈을 걸 여유가 없다. 나는 스크린에 눈을 고정하고 빈약한 나의 버튼을 누르며 생각해 보았던 역기능을 시험해 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미셸!“
카지노 인근의 커피점에서 마주 앉아서 미셸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쩌다...하는 연민의 눈으로. 나는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다.
“여긴 웬일이야?”
그리웠거나, 보고 싶던 마음도 잊혀진 옛 얘기였다. 막상 그 대상이 눈앞에 다가서자, 나는 피하고 싶고 불편했다.
“며칠 시간을 내서 찾아다녔어. 소문을 들었거든.”
“…….”
“사실은, 3년 전에 다시 만났을 때, 너의 표정에서 깊은 음영이 드리워진 걸 느끼면서도 잔인한 말로 너의 가슴을 후벼 파고 문을 나오는 순간 후회했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더라.”
미셸의 목소리가 둥글게 말려가고 있었다.
“그거 다 옛일들이야. 생전 겪어보지 못한 일들 앞에 허둥대 가며 시뻘건 눈으로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려고 달려들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미셸, 너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어.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어서 나는 나를 철저하게 학대하고 싶었고, 또 그러고 있는 중이야.”
미셸은 제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감쌌다.
“소문을 추적해 보니까, 이혼했다는 것도 마켓을 정리한 시기도 나와 만난 시점과 거의 같았어. 그리고 얼마 후 들린 소문이 카지노를 전전한다는 거고. 그게 다 그날 나 만나고 난 다음의 일이었어.”
“그렇진 않아, 그땐 이미 꿈도 그 뭣도 다 사라지고 난 다음의 빈 껍데기가 된 좀비 같은 존재였으니까.”
“전생에 죄가 많은 여자라고 생각했어, 나는. 전 남편도, 너도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게 다 내 업보가 아니라면 달리 설명이 안 되잖아.”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너에겐 그 업보라는 말은 안 어울려. 다만 너에겐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만난 불행이 있었을 뿐이야.”
나는 미셸이 그만 일어나 주기를 바랐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었다.
“밤이 늦었는데 그만 일어서. 패사디나까지 세 시간 거린데. 나는 정말이지 네게 할 말이 없어. 모든 게 다 꿈만 같아서. 그리고 미셸, 너 얼굴 마주하고 있는 이 시간이 내겐 고문이야. 내 꼴을 봐.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안 봤으면 해. 너의 기억 속에 나를 철저하게 지워.”
얼굴을 감싸 쥐고 있던 미셸이 손을 풀고 백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물기가 아롱거리는 그의 눈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이거. 만 불이야. 노름꾼에게 돈 줄 바보는 없잖아. 이건 너한테 베팅하는 거야. 너에 관한 꿈을 꾸었거든.”
“꿈?”
“내용은 말하고 싶지 않아. 부정 타. 혹여라도 내 꿈이 맞아떨어져 니가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하는 염원으로…….”
미셸이 말하는 동안 나는 문득 잭팟 꿈을 꾸었을 때를 생각했다. 세 개의 잭팟 심벌을 유심히 보았고 눈에 활활 타는 듯한 열기가 일었던 그때를.
내 예감과 미셸의 꿈. 나는 이 두 단어를 마음속에 공굴려 보았다. 생의 궁지에 몰리다 보면 별스러운 것조차도 의미를 부여하고 절실한 마음이 되는가 보았다.
주차장으로 옮겨 차 앞에서 나는 미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따뜻한 손. 미셸도 잡은 손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부끄럽고, 고마웠다. 세상 속에서 우연이었을 수도 있는 짧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미셸이, 그게 하필 나여서 미안했다.
그녀가 탄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메인 도로로 들어서기 전에 그녀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한참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미셸이 탄 차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미셸이 준 돈을 부피를 줄이기 위해 천 불짜리 티켓 열 장으로 바꿔서 지풀락 백에 넣어 허벅지 안쪽에 밴드로 묶어 놓았다. 이 돈이 내 최후의 돈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더는 버틸 수가 없을 지경까지 왔다는 걸 느낀다. 삐끼 노릇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약해졌다. 언제부턴가 내 몸이 정상적이지 못하다. 기침이 잦고 그때마다 피가 튀어 나왔다. 호흡이 가빠지면 무기력해지고 움직임이 굼뜨다. 가끔은 정신이 까무룩 해지기도 하고 등이 몹시 저려올 때도 있다.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근원과 밀접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던가. 배신의 대가, 방종의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각오하고 있다. 어떤 때는 빨리 이 지상을 뜨고 싶다. 이 세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은 나를 신은 왜 붙들고 있는지.
나는 기다린다. 내 예감을 기다리고, 미셸의 꿈을 믿고 싶다. 미셸을 본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눈에 일던 열기의 소식이 없다. 문득문득 다 별 볼 일 없는 예감이고, 육감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말이 안 될 것 같은 그것에 기대고 싶다. 내가 기댈 곳이란 어차피 쫓기는 자의 절박한 희망이 아니든가.
연휴가 낀 주말의 카지노는 많은 게이머로 붐벼 빈자리가 없다. 나는 자주 들르는 배당액이 가장 높은 곳으로 갔다. 전에 보았던 동양계 여자가 여전히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참 끈질기다 싶다가도 저 재원이 다 어디서 나오는지도 궁금했다. 아무리 가진 게 많더라도 이곳에 온 이상 망조가 드는 건 시간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그 끝은…….
옆에 빈자리가 없어 나는 두어 발 뒤에 서서 그들의 게임을 지켜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여자의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일어섰다. 나는 그 자리를 차고앉았다. 앉자마자 여자의 기계 위에 잭팟을 상징하는 세 개의 심벌에 시선을 꽂았다. 여자는 그런 나를 곁눈으로 쳐다보고 또 너야? 하는 표정으로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여자의 기계에는 소급액이 또 올라가 400만 불이 넘는 배당금이 전자 판에 계속 올라가고 있다. 참 지독히도 안 터지는 모양이었다. 나도 저 여자처럼 기왕에 운을 건다면 큰 것에 기대고 싶다. 18불짜리로 베팅 버튼을 열서너 차례나 눌렀는데도 적은 것 하나 터지지 않는다. 나는 다시 옆자리의 잭팟 심벌을 눈여겨 올려다본다.
그때였다. 눈에 신호가 온 것은!
화끈거리는 눈의 열기로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나는 속이 타들어 갔다, 옆의 여자는 일어날 기미조차 없다. 몸이 단 나는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그때 여자가 담배 연기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나는 여자 옆에서 더, 더욱 연기를 뿜어냈다. 여자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품고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언성을 높였다. 나는 다시 잭팟 심볼을 쳐다본다. 그때까지도 눈에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다 못해 여자를 의자에서 확 밀어내고 싶었다. 헤이, 헤이 이 여자야, 내가, 니 남편이냐, 피우라니 말라니 하게. 여자가 악에 받친 듯 신경질을 내며 버튼을 누른다. 그때 마침 여자의 기계에서 1,200불짜리가 터졌다. 그런 게 터지면 한동안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자가 모를 리 없다. 여자는 서둘러 티켓을 빼 들고 부ㅤㅅㅞㅅ, 제 혼자 욕설을 해대며 일어나 몇 칸 건너 자리로 옮긴다.
오, 한울님!
나는 재빠르게 자리를 옮기고 허벅지에 묶어둔 미셸이 준 돈으로 바꾼 1,000불짜리 티켓 두 장을 꺼냈다. 가슴이 연신 방망이질을 해댔다. 여자에게서 1,200개짜리가 나왔으니 미끼 같은 10타임 짜리 심벌 두 개가 자주 내려올 것이었다. 나는 맥시멈으로 버튼을 고정하고 그동안 연습해 본대로 빨리 보고 빨리 누르는 마음의 준비를 해 둔다. 계획한 대로 기계를 인위적인 조작을 해 보는 것이다. 기계는 자잘한 것이라도 잘 터질 때와 그마저도 터지지 않을 때의 비율이 있다. 잘 안 터질 때는 잭팟을 이루는 세 개의 심벌 중 두 개가 어느 때보다 자주 나온다. 그것이 고객의 애간장을 태워 그 자리에 묶어두는 미끼 노릇을 한다. 세 개의 릴이 돌다가 하나씩 멎는 시간은 약 0,3초의 인터벌이 있다. 두 개가 내려왔을 때 세 개째가 내려오기 직전 이미 시스템대로 돌고 있는 버튼을 또 누르면 시스템의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가 발생하면 0.3초의 인터벌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매우 느리게 릴이 돌다가 정해진 심벌 대신 제멋대로 내려앉는다. 어느 것이 내려올지 아무도 모른다. 오류로 내려온 심벌이 이미 내려온 잭팟 심벌 두 개 옆에 내려앉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스템대로라면 잭팟 심벌 세 개가 나란히 붙을 확률은 거의 없다. 인위적인 조작도 자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컴퓨터의 어느 사이트에 들어갈 때 몇 번의 패스워드를 누르고도 번호가 맞지 않으면 잠금(lock)이 되는 것처럼 이 기계도 세 번 정도 시스템의 오류가 생기면 작동이 멈춰버린다.
배팅 맥시멈에 고정해 놓고 나는 스크린을 쳐다본다. 두 번이나 두 개가 붙었는데도 스핀 버튼을 누르는 타이밍이 늦었거나 엉뚱한 것이 나왔다. 한 번 남은 조작의 기회.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바르르 떨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 개가 내려와 멎고 두 번째 10타임이 멎는 순간 세 번째 릴이 돌기 시작하려는 순간 재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오류가 생긴 릴이 천천히 돌고 있는 순간.
틱!
요란한 알림 소리. 잭팟이다!
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탄성. 눈앞이 하얗다. 입술을 깨물어 본다. 꿈이 아니다. 420만 불짜리 전자 판이 쉴 새 없이 깜빡이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금방이라도 멈출 것 같은 심장의 박동 소리. 눈을 뜨고도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누군가의 악다구니도 들렸다. 내 등을 무언가로 내려치는 것도 같았다. 등이 아팠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먼저 앉아 있던 여자였다.
“이 나쁜 놈, 그건 내 거야, 내 꺼! 여긴 내 자리란 말이야.”
여자는 연신 그녀의 핸드백을 휘둘러 내 등을 쳐대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온전한 정신 같지 않았다. 경비원들이 오고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여자는 더 날뛰었다.
“여기 이 사람이 내 자리를 뺏었어요!”
여자는 주변을 향해 큰소리를 호소했다. 몇몇 관계자가 상황실로 가 CCTV를 확인하고 내려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알렸어도 여자는 아랑곳없이 악을 써대었다. 경비원이 더 소란을 피우면 폭행죄와 업무방해죄로 체포해서 경찰에 넘기겠다고 은색 수갑을 여자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걸 본 여자는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특이했다. 여자는 주저앉은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다. 누구라도 저 지경이 되면 돌아버리겠지. 여자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힘없이 일어나 넋 나간 사람처럼 게임장을 빠져나갔다. 말투로 보아 중국계 같은 여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나는 아프게 쳐다보았다. 저게 누구나의 모습이었다.
프리웨이 고가 다리 밑 텐트에서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일로 나간 외엔 사흘을 정신없이 잠만 잤다. 텐트의 지붕을 걷으면 하늘엔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쏟아져 내렸다. 내게 보일 리 없었던 하늘이었다.
별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미셸이었다. 미셸을 떠올리자 더 살고 싶어졌다. 이 정도라면 한 번 더 덤벼볼 만한 액수가 아닌가.
꺼져 가던 내 삶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터진 행운은 미셸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벼랑 끝에 선 내게 절묘한 시점에 찾아온 미셸이었다. 내 꿈의 예시를 믿었다 하더라도 미셸의 뒷받침은 결정적인 역활을 해 준 셈이었다. 그것이 이미 정해진 운명의 길이이었다고 한다면 나에게 미셸은 어떤 존재일까. 병원 검진을 마치는 대로 미셸에게 가 볼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달떴다.
“아니,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있었습니까.“
흉부 CT 검사를 하고 조직검사까지 마친 의사는 내게 화를 내는 듯한 제스처를 써 가며 불편한 소식을 전하는 의사의 입장을 벗어내고 있었다. 나는 가슴으로부터 전해오는 절망의 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의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입원하고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는 했지만,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희망적인 메시지는 없었다. 설령 가능성을 얘기했더라도 나는 거절했을 것이다. 잭팟으로 얻은 행운은 병원 좋은 일 시키는 데 이바지할 것이고, 나는 병실에서 시름 대다가 끝날 수밖에 없을 일이다.
머물던 텐트를 나와 먼저 간 곳이 병원이었다. 몸이 나빠졌으리라는 건 짐작했어도 금방 죽을병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행운은 나를 찾아온 게 아니란 말인가.
*
미셸에게 가기로 했던 계획 대신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모텔로 돌아온 나는 밤새 뒤척였다. 운명에 대들다가 울고, 돈 생각 때문에도 울고, 미련 때문에도 울었다. 그러다 반짝 제정신이 들면 모든 게 억만 겁의 무게로 다가온 현실이었다. 현실이라는 것이 지난번 꿈속에서 터진 잭팟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섬뜩했다. 그때 나는 느꼈다. 살아있는 이 자체가 꿈이라는 것을. 꿈의 귀결은 죽음이라는 것을.
불길을 찾아가는 밤길은 온통 어둠뿐이다. 어둠 속에서만이 세상이, 인생이 명료하게 보였다. 거미줄같이 촘촘히 엮인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나는 그 조연의 역할을 해냈을 뿐이었다. 알 수도 없는 운명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지낸 시간도 무수한 연극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가는 행위가 죽음을 좇아가는 행위였음을.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이라던 신경림의 시구처럼 지상에서의 지난 세월은 다 아름다워 보였다. 아팠거나 슬펐거나 괴로웠던 일마저.
저만치서 휘황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나 나를 울게 했던 저 불빛.*
*피냐타: 중남미 국가의 어린이 축제에 사용되는 동물 모형의 각종 종이 인형. 인형 속에는 사탕이나 과자류가 있어 아이들이 막대기로 인형을 부숴서 내용물을 빼는 놀이. 인형이 쉬 부서지지 않고 단단하다.
△약력
2016-2018 미주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시. 수필
제24회 재외동포문학상 산문
2025년 동양일보 무영신인 문학상 소설 당선
△수상소감
미국에 이민 와서 43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지금이야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의 이민자들은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이는 사막의 땅 캘리포니아에서 햇빛과 맞짱뜨며 긴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누구는 자리를 잡았고, 누구는 낯선 이국의 햇빛을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세상의 중심에 들지 못한 진달래 같은 내 이웃의 이야기를 글로 쓰리라 작정했습니다. 모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의 한 맺힌 이야기들을. 입양아들의 가슴 저미는 아픔이며 기지촌 출신 여인들의 애환이며….
일선에서 물러날 시간을 기다리며 때를 기다리다 예순여섯 살이 되던 해에 은퇴하고 본격 글공부에 임했습니다. 고시 공부를 하듯. 그중에 도박으로 신세를 망친 사람의 이야기를 써서 올린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세상살이의 모든 결과는 근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운명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문학 축제의 한마당을 열어주신 청송군과 경북일보사,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