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가을볕에 잘 여문 통무가 쩌억 쩍 갈라져 깍둑깍둑 썰린다. 걸핏하면 눈물만 찔끔대게 하던 예전의 그 칼날이 아니다. 시퍼렇게 날 세워 파고드는 날카로움이다. 기다리던 나무 도마가 칼날의 노고를 위무하듯 지긋이 받아 품는다. 하얀 속살을 비집고 흐르는 온순한 눈물만 통증을 대변할 뿐 한갓진 순응 모드다. 가슴께가 뻐근해진다. 이 순간, 잘 벼른 저 무쇠 칼 앞에 도저한 저항이란 있을 수 없다. 무자비한 절삭만 있을 뿐이다.

눈이 되지 못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칼 벼르기 참 좋은 날이다. 이런 날, 출장이 잦은 칼갈이 아저씨는 가게에서 뽕짝을 곁들인 믹스커피에 혼곤히 취해 있을 터이다. 곧 있을 대가족 행사 준비로 침체한 기분을 털어 일으킨 후, 고만고만한 중형 크기의 무쇠 칼 세 자루를 신문지에 말아 들고 시장으로 내달린다.

많이 겪었으므로 맷집이라도 생겼나. 내 오랜 부엌 무쇠 칼들은 이제 칼갈이 기계 앞에서 생존본능이 절로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듯하다. 아저씨는 잽싸게 칼갈이 기계를 옮겨 다니며 너무 뉘지도 세우지도 않으려 자신의 촉부터 벼린다. 번쩍이며 튀는 섬광 불빛에 내 몸도 덩달아 으스러질 듯 저린다. 한낱 쇠붙이지만 부엌에서의 중노동 후 다시 중노동을 위한 저 처절한 고통 앞의 결기가 처연하다. 내 습관대로 정직하게 닳고 기울어진 채 부엌에서 함께 한 그 시간이 얼마던가. 저 순교의 시간이 있어, 나는 제 살 깎아 세운 벼림의 끄트머리를 잡고 다시 부엌에 들곤 했었다. 그리고 요리하는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중요한 일을 같이 한 사람만이 닮는 건 아니다. 물건도 주인을 닮는 모양이다.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쇠붙인들 닮지 않을까. 반드시 어디에 도착한다는 욕망도 없이, 남들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도달할 수 없다고 말려도 타박타박 걸어온 내 삶과 참 물색없이 닮았다.

엄마는 아들 다섯을 연이어 낳은 뒤 얻은 첫딸이 더디게 자라자 속을 끓였다. 쑥쑥 자라 바쁜 손 하나 덜어주길 고대했겠지만 작고 마른 데다 잦은 병치레로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나 눈썰미 하나는 야물었던지 곧잘 엄마의 손끝 흉내를 내곤 했다. 팔뚝만 한 숭어 아가리를 지그시 누르고 은비늘을 털어낸 뒤, 무쇠 칼로 회를 치는 엄마의 재빠른 손놀림에 어린 나는 감탄하곤 했다. 마침내 지나친 호기심은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바쁜 농번기에 새참을 가지러 오지 못한 엄마를 대신해 달챙이 숟가락과 무쇠 칼로 감자를 깎아 삶았다. 취학 전의 아이가 양재기 가득 감자를 삶아오자, 들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했지만 정작 엄마는 담담했다. “ 이제 칼을 이기는 힘이 생겼구나. ” 이긴다는 것의 또 다른 말은 좋아한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사랑의 다른 말이라도 좋겠다. 그 순간 뱃속이 울렁울렁 따뜻해졌다. 마음도 폭신폭신했다. 나는 그 따뜻한 기억으로 일생 무쇠 칼만 고집한다. 못생긴 듯 무겁고 투박하지만 들기만 하면 경건해진다. 엄마가 늘 앞에 있는 듯 느껴진다. 지금껏 그 흔한 채칼 하나 없이 대가족의 부엌을 평정한 원동력은 그 오랜 기억의 힘이다.

요즘 사람들의 눈에 시커먼 무쇠 칼은 늦은 오후에 발견한 낮달 같은 물건일지도 모른다. 조금은 이상하고 서러운, 불쑥 등장한 서툴거나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서 수줍게 보이는 물건처럼 낯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부엌에서만은 나를 최고의 투사로 만들어주며 서로의 삶을 촉발하는 우정어린 물건이다. 사물과 인간이 나눈 오랜 우정의 흔적 또한 상호 돌봄의 구체적인 관계로 빛나고 있음을 체감한다. 그 시간의 얼굴에 담긴 결기마저 마음 겹다.

나는 편한 것보단 좋은 것에 마음 주는 편이다. 오래 바라보아야 스며든다. 달아지고 망가져 가며 서로의 모습에 내 모습을 비춰보며 돌보는 마음도 담겨 있어 좋다. 살아가면서 내 안에 조금씩 스며든 온기가 쌓여 축적된 온도는 그래서 소중하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