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눈을 기다리는 마음이었을까. 시작의 선율은 이른 아침 햇살 머금은 숫눈 위에 사뿐히 섰을 때의 느낌으로 왔다. 그 해사한 설경으로 자늑자늑 스며들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혼자 외로이 오지 않았다. 고요와 열정 그리고 설렘, 낭만과 손잡고 왔다. 먼 하늘에서 바다로 향해 하얀 눈송이 내리듯 찬찬히 녹아들어 한 사람의 순간을 지배했다. 나는 그 순간에 스며들려 매화향 맡듯 눈과 귀, 마음을 열고 끝없는 심연에 집중하였다.

때론 뭔가를 읽거나 보고 들을 때 울컥할 때가 있다. 그 뭔가가 마음을 건드리는 탓이다. 위로가 돼서, 현장의 역동감에 압도당해서, 실존에 대한 깊은 성찰에 공감해서이다. 나 또한 긴장과 이완의 모호한 경계를 숨차게 넘나들며 ‘차다, 이울다’에 갇힌 채 몰입했다.

지난겨울 초입, 포항 국제 음악제 개막 공연을 보러 갔다. 바다를 주제로 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플루티스트의 협연은 마치 숫눈길을 걷는 청중들을 거침없는 기세와 맹렬한 서사로 이끌었다. 이른 아침 윤슬 반짝이는 바다를 향해 고즈넉하고 정갈한 선율로 남실대기도 했다. 그러나 섬세하고 절도 있는 목관과 변화무쌍하게 휘몰아치는 현악의 조화가 빚어낸 절정의 선율로 치달을 땐 광활한 바다는 신열 앓듯 시퍼렇게 날 세웠다.

두부처럼 부드러운 플루티스트는 끊어질 듯 유려한 리듬감과 긴 호흡으로 돌올한 존재로 위엄을 과시했다. 그 분위기는 마치 오케스트라라는 육중한 골리앗을 마주한 다윗처럼 보였다. 골리앗의 압도적 음량은 여린 몸집의 다윗을 배려하지 않았다. 환상과 서사 가득한 다윗의 무량한 듯 은은한 음량 또한 골리앗에 전혀 밀리지 않고 정중히 맞섰다. 그 신비한 듯한 조화로움엔 강력한 마력의 마술봉 같은 지휘자의 지휘봉이 있었다.

귀보다 눈이 먼저 열려 마주한 공연이었다. 지휘자의 몸짓과 지휘봉을 한순간도 놓칠 수가 없었다. 지휘봉의 끝은 과묵하고 신중하게, 때론 노련한 밀도와 깊이로 사색에 천착해 협주를 이끌었다. 마치 수많은 초능력의 촉수를 지닌 듯 강약과 고조를 넘나들며 음정과 음색을 탐색해 조화를 부리듯 했다. 연주자들을 향해 무궁무진한 언어를 지휘봉 끝에 담아 토해냈다. 벼락에 맞서는 피뢰침처럼 땅을 솟구치듯 하늘을 가르듯 번쩍일 때면 충만함으로, 그리고 끝내는 환호하는 무리 지은 갈대숲의 물결처럼 밀려와 쉼표의 잔향까지 어루만져 거푸거푸 내 마음 차지게 했다. 무한 풍요가 아닌 적절함 속에서의 충분함이었다.

골리앗을 이끄는 지휘자는 도저한 저항의 열정으로 치닫다가도 귀한 손님 대접하듯 부드럽고 유연한 조율로 바듯하게 이끌었다. 마치 카메라가 잡은 먼 곳의 사물처럼. 그 거리감을 지워내고 대상을 바로 눈앞에 가져다 놓는가 하면, 봄 꿈꾸듯 아련한 긴 여운으로 멀어지게도 했다. 한 편의 퍼포먼스를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내 삶의 죽비처럼 내리치듯 지휘봉 끝의 촉이 주는 그 마력에 나는 스스로 보름달처럼 찼다가 다시 초승달로 이지러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약하고 오롯이 내 것일 수도 없는 불안전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아름답고 단순하고 평온한 내 나름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라 했던가. 글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 꺼내 읽은 한 권의 시집처럼 삶의 쉼에서 얻은 귀한 잔향의 위로였다. 울울한 전나무 숲길을 걷듯, 영혼은 맑아져 위로와 영감마저 무량(無量)해졌다.

인간은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다. 그것이 문학이든 예술이든 기댐의 그 자체가 위안이다.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기에, 삶에 위로는 소중하다. 서로 위로하는 일은 우리에게 슬픔보다 잦은 기쁨을, 고통보다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봄이다. 웬만한 슬픔도 초라해지고 무한 긍정을 배우는 계절이다. 이 계절 위로하고 위로받자.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