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이 생산한 산물을 먹고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 속으로 간다.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다. 자연은 부모요, 인간은 그 자식인 셈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정신적 가치의 영감까지 제공한다.
도연명(잠)은 사시(四時)에서 춘수만사택 하운다기봉 추월양명휘 동령수고송이라 읊었다. 봄의 은혜로움, 여름의 변화무쌍, 가을의 싸늘함 속의 빛남, 겨울의 추위를 홀로 견디는 소나무의 기상이다. 가치 있는 삶의 자세를 자연에서 찾은 것이다.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인 성삼문은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 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있어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라 읊었다. 단종이라는 한 명의 임금을 향한 충성심을 넘어, 시대를 초월한 정의와 도덕적 가치를 후대에 전달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연을 빗대어 자신의 지조와 충절을 어떤 상황에도 변할 수 없도록 요지부동으로 묶어놓고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도 지조를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반인륜이고 패륜이었다. 충격을 받은 김시습은 학문을 닦으며 지향해 왔던 삶을 버리고 방랑의 삶을 택했다. 경주 금오산에서 설잠(雪岑)이란 스님으로 지내면서 창작한 ‘금오신화’의 ‘이생규장전’을 통해 유교적인 규율에 얽매이지 않은 진보적인 여성관과 시대를 앞서가는 근대적 자유연애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매월당의 눈에 인심만이 아니라, 변덕이 심한 자연 현상이 보였다. 시(詩) ‘사청사우(乍晴乍雨)’. 날이 맑다가 비 내리고, 비 내리다가 도로 개이니(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하늘의 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인심이야.(天道猶然況世情). 나를 칭찬하다가, 곧 도로 나를 헐뜯고(譽我便是還毁我), 명예를 마다 더니 도리어 명예를 구하네(逃名却自爲求名).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을 봄이 어찌 하리오(花開花謝春何管). 구름이 오고 구름이 가는 것을 산은 다투질 않네(雲去雲來山不爭).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모름지기 알아두소(寄語世人須記認). 기쁨을 취하되 오래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取歡無處得平生).
금세 개었다가 비가 쏟아지고, 쏟아지다가 다시 개는 날씨처럼 세상인심이 조변석개한다. 사람들은 명리에 초연한 것처럼 하면서 도리어 더 명리를 욕심내는 행태를 보인다. 꽃이 피든 지든 봄이 간여치 않는다. 구름이 오든 가든 산이 관계하지 않는다. 그저 그대로 두고 볼 뿐이다. 봄처럼, 산처럼 살고 싶어 한다.
매월당은 변화하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 초월 달관한 자세의 삶을 말하고 있다. 기쁨을 취하여도 오래 누릴 것은 못 된다고 했지만, 약간의 여유가 보인다. 봄처럼, 산처럼 초연한 삶을 말하고 있으니 타협해 볼 여지가 보인다. 간여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그래서 생육신인가 보다.
타협하기 싫어하고, 원칙적이고 교조적인 독야청청의 삶을 산 사람이 성삼문이다. 지조 없이 흔들리는 정치가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에서 절벽 위의 낙락장송이 독야청청하는 지도자가 있을 리도 없지만 있어서도 곤란할 것 같다.
세상사가 외통수로 풀리는 것이 아니다. 사청사우. 맑았다 흐렸다 하는 세상, 변덕이 심한 세상이다. 독야청청이 너무 지나쳐서 배타성을 띄고, 나와 너를 편 가르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으며,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흑백논리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사청사우 변덕이 심한 세상에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찾아야 한다. 타협이 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