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친절한 이웃 덕에 당근마켓에 입문했다. 중고 거래나 나눔, 재능기부와 취미생활까지 동네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커뮤니티 앱인 그곳은, 사람과 사람들의 마음이 들고나는 인연의 바다였다. 쓸모라는 이름표에 가격과 설명을 붙이고 거래하거나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붓하게 감각하고 감응하는 곳이었다.
나이 들면서 익숙했던 좌식 생활에 변화가 필요해 보였다. 일어나고 앉을 때마다 약해진 허리며 닳은 무릎이 먼저 비명을 질러 댔다. 이제는 결심의 영역이었다. 매끼 마다 대가족을 불러 앉히던 원목의 긴 좌식 식탁과 짧은 휴식을 책임지던 안방 소파를 빼낸 자리에 의자형 식탁과 침대를 놓았다.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나던 것들이 사형선고 같은 딱지를 붙인 채, 담장에 기대 수거 차량을 기다리는 처량한 모습을 많이 보아온 터라, 선뜻 내놓지 못하고 망설이던 때였다. 당근을 만나 미뤄 뒀던 결심이 한결 수월했다.
사진을 찍어 올리며 나눔을 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삽시간에 댓글이 날아들었다. 팔고 사는 속도의 타이밍 또한 무한 반복의 파도 운율처럼 느껴졌다. 먼저 가져가겠다는 이에게 우선권을 주고 예약을 받았다. 굳이 돈 들여 딱지를 붙이지 않고도 소파는 곧바로, 식탁은 저녁에 새 주인을 따라 떠났다. 다음날 식탁을 가져간 이로부터 사진 두 장과 함께 고마움의 긴 문자가 왔다. 나는 가끔 들기름으로 닦아주면 오래 쓸 거라는 오지랖 넓은 당부로 화답했다. 내 습관대로 정직하게 닳고 손때묻은 식탁과 함께한 그 익은 시간도 같이 보냈다.
이참에 지난 지진 때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대형 유리 장식장 두 개도 내놓았다. 새로 지은 농장에 가져간다며, 일가족이 달려와 손수 달인 사과즙 한 상자를 놓고 갔다. 며칠 후, 썰렁했던 집이 환해졌다며 이슬 맺힌 겉절이 배추와 알토란 무를 들고 부러 먼 길을 왔다. 나는 고마움의 답례로 차츰 이용이 뜸해지는 차탁 세트를 트럭에 올려 주었다. 허전할 거라 여겼던 빈 곳이 이미 그들의 정이라는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시내 외곽지 농장에서 다육이 한 상자를 가지러 갔더니, 방금 구웠다는 따끈한 붕어빵 한 봉지를 주었다. 그뿐이랴. 그곳의 맑은 가을 햇살과 그윽한 국화 향도 덤으로 실어줬다. 다가섬과 베풂의 그 따뜻함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삶이란 어쩌면 파도의 가르침 대로 매일매일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치열한 반복일진데, 서로에게 꼭 맞는 무언가가 되는 일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닳고 낡아지는 모습으로 기꺼이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은 또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또한 저들은 어떤 이유로 귀찮음을 감수하면서도 사고, 떠나보내는 걸까. 저들이 함께 서로 주고받는 마음이, 관계가, 익어 갈 그 시간이 내심 궁금해졌다.
선걸음에 예약한 소품 그림 한 점을 가지러 가면서 설렜다. 제법 연륜 있는 화가라 짐작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생글거리며 다가온 이는 앳된 아가씨였다. 첫 판매 기념으로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한사코 돈 받기를 거부하는 그녀에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붕어빵 봉지를 기어이 줘 보냈다. 그림값으로 그녀가 앞으로 바라볼 하늘이 더 맑고 넓어지기를 기원했다. 저들도 나처럼 필요와 애호를 자문하고 간소화하는 기분이 들까.
방치된 물건들을 쓸어보고, 오래된 물건도 다듬고 정리하면서 내 생활을 좀 더 돌아보는 며칠이었다. 어쩌면 무한 반복됐을 파도의 밀물과 썰물 같은 그 행위가 숭고하듯, 이렇듯 서로 주고받으며 마음이 차거나 이울어 가슴을 건드리는 일이 더 숭고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쓸모를 다한 물건이 누군가에겐 쓸모 있음의 기쁨이 되고, 한 사람의 추억과 역사를 뒤집어쓴 물건이 내 집에 와 남는다는 건 쾌 매력적이고 어쩐지 멋진 일일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