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윤혜주 수필가

봄의 초록이 설레게 해 길을 나섰다. 고요한 사색을 꿈꾸며 봄이 비치는 물길 따라 자박자박 걷는다. 걷는 발걸음 따라 바람이 느리게 쫓아온다. 봄을 거니는 물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마음을 틔운다. 살랑거리며 따라오는 봄빛에 앳된 초록이 곳곳에 피어오른다. 목마름을 견디며 싹을 틔워 올린 풀들이 나직한 숨결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차진 봄볕이 양기를 보태니 풀과 나무에도 토실토실 젖살이 올랐다. 생명의 숨결이 온존하다. 들꽃이 드레드레 핀 길로 향한다. 꽃의 재잘거림이 유난하다. 다양한 꽃과 연둣빛 조화로 단아하다. 가랑비에 물기 머금었다 뱉어낸 초록의 색채로 숨이 멎는다. 봄의 신선한 기운과 충만한 생명력을 향해 숨을 한껏 들이켜 허파를 가득 채운다. 봄이 선뜻 내 속으로 들어온다. 초록의 봄물이 부드럽게 스며든다. 나는 지천으로 널린 봄을 만끽하며 봄물에 든다.

인간의 기억을 사유하기 적당한 때가 봄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색을 궁구(窮究)하며, 계절의 변화무쌍한 색의 농담에 눈과 귀를 여는지도 모른다. 걸음걸음 봄 냄새가 완연하다. 봄 냄새는 지난겨울 우리 안에 잠든 기억을 자극하고 억눌린 감정을 일깨운다. 여린 새싹을 들여다보는데 알싸한 향기에 코끝이 간지럽다. 도처에 가득한 환하고 무해한 아름다움으로 턱밑이 훈훈해진다. 이즈음 강물의 흐름이 바뀌듯 생각의 방향도 바꿔, 바람도 공기도 다 내 편이고 나를 도와줄 것만 같다.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겨우내 숨탄것들은 바람결에 봄이 스며오고 있음을 알아채고 생체시계가 반응했을 것이다. 자연의 순리를 인정하고 말랑한 여유로 기다렸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북풍에 말린 하얀 옥양목 같은 대지에 바람과 볕이 합세해 이렇듯 순하고 예쁜 초록으로 봄물 들여놓았다.

그러나 겨울의 시간을 이겨낸 꽃송이들은 아직 붉고 난만한데 벌써 지고 있다. 밤이면 조등처럼 하얀 등불 밝히던 백목련도 시나브로 떨어지고 있다. 찰나 같은 짧은 생, 가지를 붙잡고 애써 봄바람의 풍장을 외면했지만 제 무게를 덜어내고 누렇게 변색 되어 길바닥에 처연히 누웠다. 이제 남은 마지막 물기마저 바람에 맡긴 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짧아서 서러운 행복이다. 애잔한 잔상의 아름다움이다. 이렇듯 절정의 아름다움에서도 벚꽃잎은 소란 떨지도, 개나리꽃은 까불대지도 않은 채 바람이 이끄는 대로 난분분하다, 바람 따라 한 생의 흔적을 미련 없이 잘게 쪼개 순장(殉葬)하듯 봄물에 스며들 뿐이다.

봄비 끝에 혀끝에도 봄물 들었다. 요즘 새벽시장이 싱그러운 봄나물로 향긋하다. 순한 유채 나물은 살짝 데쳐 된장에 조물조물 무치고, 미나리도 들깨 듬뿍 무쳐냈다. 뚝배기에 된장 풀어 냉이와 모시조개, 두부를 넣어 끓였다. 쌉싸름한 냉이의 부드러운 질감에 혀가 굼실거린다. 봄나물의 제왕이라는 개두릅도 데쳐 초장을 곁들였다. 무밥에 달래 한 줌 송송 썰어 양념장도 만들어 올렸다. 쌉쌀한 초록이 몸속 깊숙이 스며들자, 입이 먼저 벙근다.

저 멀리 도랑을 따라 앉은 웅덩이가 나른하게 누워 뭇 생명에게 젖 물릴 준비를 하고 있다. 소나기처럼 왔다 갈 봄을 열심히 퍼 담고 있다. 겨울을 지독히 짝사랑하다 보낸 봄의 눈물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눈물을 온몸으로 삼켰다가 다시 뱉어낸 우리들의 눈물일까. 순한 봄비가 잦다. 지난겨울, 우리는 작은 배를 달래가며 풍랑을 넘어온 어부처럼 하루하루를 꽤 장엄한 투지로 견디어 왔다. 두려움이 성에처럼 끼어 있던 마음들이 얼마나 이 봄날의 햇살을 기다렸던가. 지금껏 잘 버텨온 나날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인 같은 봄날이다.

간간이 찾아들던 강변의 작은 카페도 문을 열었다. 겨우내 묻은 먼지와 공기를 털어내고 봄기운을 들였다. 병아리색 커튼과 테이블보로 새로 단장한 실내도 봄물 들었다. 찾아온 살바람에 커피 향도 봄물 따라나선다. 정녕 살아온 기적으로 살아갈 기적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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