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일 편집부국장
곽성일 편집부국장

정치는 결단의 예술이자, 기다림의 미덕이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해도,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는 단순한 표결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오래 생각하고, 깊게 숙의하고, 신중히 합의해야 한다. 이런 전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된 지혜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동양의 신라 화백회의와 서양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콘클라베다.

신라의 정치 체제는 ‘성골’이나 ‘진골’ 같은 골품 제도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끝없는 충돌 속에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백회의’라는 정치 메커니즘이 존재했다. 고대 신라의 귀족들이 경주의 도당산(道堂山)에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전원합의제로 결정했다는 기록은, 오늘날로 치면 내각 회의가 만장일치로만 작동하는 셈이다.

심지어 왕의 폐위까지도 화백회의의 합의로 결정됐다. 진지왕은 전쟁 준비를 서두르다 ‘불안정한 지도자’라는 판단을 받아 귀족 회의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왕위는 형식적 세습이 아니라 회의 합의에 따라 다음 후보에게 넘어갔다. 이는 단순한 귀족 정치가 아니라, 합의와 절제가 담긴 정치 철학의 구현이었다.

반면 서양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라는 제도가 있다.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의 최고 지도자이자 정치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만큼 선출 과정은 철저하다.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들은 바티칸 시국 안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머물며, 몇 번이고 투표를 반복한다. 백연(白煙)이 나기 전까지 누구도 교황의 자리를 확정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만장일치’가 아니라, 반복적 ‘숙의와 설득’이라는 점이다. 개인적 이해나 지역적 균형보다는 교회 전체의 방향성과 안정성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는 화백회의의 전원합의와 본질적으로 닮아있다. 권력을 나누고, 결정을 늦추더라도, 구성원 전체가 수용 가능한 결론에 이르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이 두 제도는 지리적으로 전혀 다른 문명에서 발생했지만,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전원합의 또는 반복 숙의라는 절차를 통해, 권위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거나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이는 곧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신라에서는 그 정당성이 왕권이 아니라 귀족 전체의 합의에 있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신의 뜻을 대리하는 교황이라 하더라도 인간 세계의 합의를 통해 등장해야 했다. 이는 권력의 신성함을 인정하되, 그것이 절대화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지혜다.

오늘날의 정치는 다수결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 다수결이 과연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일까? 오히려 다수결이 소수의 침묵을 강요하고, 권력자가 민심을 독점했다 착각하는 폐단도 자주 목격된다. 특히 최근의 한국 정치는 갈등이 표면화된 채 타협과 절제가 실종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화백회의와 콘클라베의 지혜가 빛난다.

국가의 장래가 걸린 문제, 사회 전체의 규범을 바꾸는 개헌이나 사면, 탄핵, 외교안보 관련 결단은 단순 다수결이 아니라 깊은 숙의와 설득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정치의 품격은 속도보다 절제에 있다.

신라는 당시로선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합의 중심 체제를 운영했다. ‘왕이 절대가 아니다’라는 사고는 절제된 권력의 상징이었다. 유럽의 교황 선출 과정 역시 13세기 이후 오랜 시행착오 끝에 형성된 합의제다. 정치가 안정되려면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책임을 명확히 나눠야 한다.

그 점에서 신라의 화백회의는 한국 정치가 배워야 할 제도이다. 지역 이기주의나 당파 이익보다 국가 공동체의 존속과 균형을 먼저 생각하는 합의 문화는, 고대의 것이면서도 오늘날에 더 절실하다.

신라의 도당산에서 울린 만장일치의 고요한 결론, 바티칸의 콘클라베에서 하늘로 피어오른 하얀 연기. 이 두 장면은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어선 정치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지도자는 어떻게 선출되어야 하며, 권력은 누구의 동의 아래 행사되어야 하는가.

정치가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선, 다수의 힘에 기대기보다 전체의 뜻을 구하려는 절제가 필요하다. 그 절제와 기다림 속에 진짜 리더십이 탄생하는 것이다. 천 년 전 신라가, 그리고 오늘날 바티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곽성일 편집부국장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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