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물은 기억으로 각인된다. 그러다 어느 해거름 녘, 꽃이 때리듯 문득 찾아온다. 그 기억 속에는 더 먼 옛날의 내가 있어 반갑다. “나를 기억하시는지요.” 조금은 깊고 어두운,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사내의 전화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무춤거렸다. 거뭇하게 어둠이 내리는 시장은 소란스럽고 무리 지어 둥지를 찾아가는 새 떼처럼 제 갈 길 찾아 서두르고 있었다. 나 역시 떨이하는 시금치 두 단과 떡집 좌판대에 남은 인절미 한 팩을 집어 들며 서두르던 때였다. 순간, 들고 있던 시장바구니에서 봄이면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아내를 따라가며 사랑은 수고스러움이라 말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사내는 오래전, 어떤 사회단체와 돌봄으로 연계해 맺은 다문화 가정, 란의 남편이었다. 베트남 여인 란은 십여 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우리말이 서툴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의욕도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자연 바깥 생활도 어려워 은둔하다시피 집에만 있는 란의 모습에 사내 또한 지쳐 가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여느 다문화 가정의 여인네들이 겪고 있다는 여러 가지 문제를 염두에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예의 바르고 총명한 란은 고향에서의 의욕 넘치던 직장 생활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대신한 가장으로써 어린 동생들과 병중의 어머니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결혼한 자신을 자책하며 후회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보였다. 마치 간질간질 한번 시작된 기침이 의지로 그쳐지지 않듯 그렇게.
작은 출판사에서 일을 하는 사내는 매우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쉽게 지치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았지만, 창의성과 섬세함을 지닌 결이 고운 남자였다. 때론 내게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은데, 삶의 온도는 쉽게 올라가지 않는다며 허기진 속내를 풀어 놓았다. 열심히 사는 게 잘 사는 거로 생각하는데 좀체 나아지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며 한숨 쉬기도 했다. 고아인 자신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가족과 삶의 온기와 속도를 높이고 싶은데 어렵다며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은 진즉에 가진 것 없어 빛나는 별을 부러워하거나 욕심낸 적 없다며, 그저 스스로 낼 수 있는 만큼의 빛으로 살겠노라며 눈물을 거두고 다시 일어서곤 했다. 간절함에서 나온 사내의 절박한 발버둥이 눈물겨웠다.
내가 지켜본 사내의 아내 향한 마음은 애틋했다. 미련하고 수고스러운 것이 우리 사랑이라 했던가. 꽃이 피었어도 제 마음에 심어야만 꽃이고 그걸 발견하고 해석해야만 꽃이라는 걸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영혼은 두고 몸만 와 있는 듯한 아내를 위해 낡은 시장바구니를 액세서리처럼 끼고 다니던 사내. 퇴근길에 아내가 좋아하는 호떡 두 개를 따뜻하게 품어 오며 인생의 숙제처럼 자기만의 문 하나를 발견하려 애쓰는 건실한 가장이었다.
세상에는 다이아몬드나 행성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오는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항성이 아닌 이상 어딘가에서 나는 빛으로 반사할 뿐이다. 모두가 다이아몬드나 행성처럼 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반딧불이가 다이아몬드나 행성보다 못한 게 뭔가. 마침내 사내는 내게서 흔들리면서도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며 란과 아이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감수한 수고스러움이었다.
여름이면 무수히 빛나는 반딧불이와 유년의 시간을 보냈다. 여름밤이 더 아름다웠던 건 스스로 낸 작은 빛들이 모여 반짝이던 반딧불이 때문이었다. 어쩌면 우리 삶은 행복을 위해서 살면 더 고달픈지도 모른다. 사는 것 그 자체로도 힘든 일이라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을 밝게 빛내는 건 반딧불이 같은 이들이 제자리에서 제 스스로 낸 고유하고 또렷한 작은 빛들이 모여서다. 지난겨울 격동의 시간에도, 산불 연기에 아지랑이가 삼켜지는 검은 봄에도 반딧불이처럼 빛내는 이들이 있어 아름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