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고대 이래 인간 사회의 질서를 지탱해 온 핵심 개념이다. 그러나 정의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는 항상 타자, 곧 부정되어야 할 악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현된다. 이때부터 정의는 자기완결적 윤리가 아니라, 상대를 설정함으로써 구조화되는 정치적 언어가 된다.
악은 정의를 작동시키는 장치다.
현대정치에서 이 메커니즘은 ‘진영’이라는 방식으로 고도화된다. 진영은 윤리적 구분선이 아니라 정체성의 경계선을 긋는 작동체계이다. 어느 한 집단이 스스로를 ‘정의의 편’으로 위치시킬 때, 그것은 논리나 사실의 문제라기보다 감정과 소속의 문제로 전환된다.
정의는 선택된 자들의 몫이 되고, 악은 필연적으로 외부화된다. 여기서 생략되는 것은 인간의 결함에 대한 성찰이다.
정의가 정념으로 타락할 때, 사유는 사라진다.
정치적 정의는 종종 수단의 정당화로 귀결된다. 입시비리, 계엄령, 사법부 탄핵 등 본래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행위조차 “악을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에 포섭된다. 이런 논리 구조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조국의 비리는 검찰개혁의 불쏘시개’, ‘계엄령은 반국가세력 척결의 도구’, ‘탄핵은 사법쿠데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라는 서사는 모두 ‘정의’라는 이름으로 악의 수단을 사용한 경우다.
정의가 목적이 아닌 정당화의 언어로 기능하는 순간, 정치적 윤리는 붕괴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를 치르고 권력을 교체하는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하나의 정답이 아닌, 다수의 관점이 충돌하는 공간으로 이해하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두 가지 전제를 요구한다.
첫째,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전제. 둘째, 타인의 관점 역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전제.
이 두 가지가 배제된 진영정치는,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추었더라도 내적으로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구조를 형성한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란,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을 제도화한 체계다. 즉, 민주주의는 신념의 일치가 아닌 판단의 분열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이해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내가 옳기 때문에 너는 틀렸다’는 논리보다, ‘내가 옳을 수 있어도 틀릴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진영의 언어는 이 인식을 삭제한다. 진영은 정치적 자아를 도덕적 정체성과 일치시키며, 반대 진영을 윤리적 타락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그 결과 상대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되고, 민주주의는 공존의 공간에서 제거의 도구로 변질된다.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적 정체성이 윤리적 독점으로 전이되는 데 있다. 이러한 전이는 공동체를 정화와 배제의 연속적 반복으로 이끌며, 사회 전체를 도덕적 내전의 상태로 몰고 간다. 그 어떤 정치도, ‘악의 타자화’를 무기 삼아 정의를 독점하려는 한, 그 자체로 폭력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정의란 타자를 악으로 구성하지 않아도 가능한가. 민주주의는 그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할 수 있는 체제일 때에만 지속 가능하다. 정의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질문이 민주주의를 유지한다. 그 질문이 멈추는 순간, 정치 체계는 신념의 공동체가 아니라 신화의 교단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