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지척에 두고, 찾는데 시오리쯤 헤맸던 것 같다. 추적추적 제법 굵은 봄비가 살라 먹은 어둠 탓일까. 작은 네온사인 간판은 까무룩 하니 졸 듯 가물가물했다. 허위허위 여러 번 지나치고 있는 어리바리한 방문객을 붙잡아 세우지 못했다. 낮은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작고 낡아서 뭇시선 사로잡지 못해도 발길 이어지는 집. 여기, 이윤 없이 실제로 든 비용만으로 가격을 책정한다는 들무새 마음 겨운 실빗집이 있다.

아늑한 고립이 찻물처럼 고이는 날엔 연하 실비로 가보라. 혹여 짙은 허기와 고독으로 깊은 어둠 속에 침잠해 있는가. 현실에 마음 다쳐 이마 끝에 날 선 바람 품고 사는가. 그런 사람 우선으로 반기는 곳이다. 그때, 밥집인 듯 술집인 듯 풍겨오는 알큰한 술 냄새와 구수한 밥 냄새는 관념이 아닌 실제로서의 구원이 되어 줄 것이다. 지루한 절망보다 한 뼘 더 큰 불굴의 희망을 바란다면 무심한 듯 주인장이 차려 내주는 안주에 코 박고, 입으로 술 들이켜며 흐득흐득 하거나 꺼이꺼이 한 번쯤 소리 내 울어도 괜찮은 집이다. 그러다 술로 영혼을 채우고, 안 주로 배 채운 뒤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파과(破果)라 생각했던 자신이 더 맛있는 과일이라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어깨 통증에 공짜 파스 두어 장 얻어 붙이고 나오는 기분마저 들지도. 가끔은 비릿한 죽도어시장의 질박한 바람과 이웃한 죽도 성당의 유심한 종소리도 달려와 합석하는 집. 술보다 안주가 더 고파질 때 찾는 집. 연하 실비만이 갖은 오지랖 넓은 매력이다.

그 사람을 알면 의도가 보이고 의도를 읽으면 행간도 보인다고 했던가. 주인장 안동권씨 권여사의 언어는 겉으론 거친 듯하지만, 내재 된 안의 언어는 부드럽다고나 할까. 때론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시퍼런 욕설로 상한 영혼을 위로하기도, 분노하는 손님을 대신해 목청 높인 울분의 추임새도 곁들인다. 오랜 시간 수많은 단골을 둔 이력의 소유자답다.

안동에서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해 십여 년 만에 사별하고 혼자가 된 권여사는 운명처럼 만난 지인의 말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했다. ‘막 벌어먹기에 좋은 곳.’이라는 그 말에 어린 남매 데리고 용기를 내 시작한 실빗집이 어언 27년. 맞은 편 국제 나이트클럽이 한창 불빛 찬란하던 시절, 누군가 하다 비워둔 일곱 평 남짓한 그곳을 그때 그 간판으로 지금껏 질펀하게 궁둥이 붙이고 있다. 찐 단골들은 말한다. ‘음식엔 진심인 집이라고.’ 그래서 술보다 안주를 더 찾는 이들이 배타적 경계를 허물 듯 찾는 곳이다. 오랜 시간 술꾼들의 입맛을 맞추고 공간을 다독인 주인장의 단단한 내공 탓일까. 연하 실비의 술상은 소담한 듯 오달지다. 간이 잘 맞아 감각적 의미의 시원한 맛이다. 좁은 실내를 오가며 주섬주섬 덧올려주는 주인장의 손끝에서 깊고 그윽한 엄마의 손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제철 음식이 보약이라 말하는 그녀만의 음식 철학은 부지런함에 있다. 새벽마다 죽도어시장을 홅고 와서일까. 싱싱한 해물만으로도 술상은 그득하다. 막 삶아낸 돼지 수육과 진한 멸치 액젓에 버무려낸 배추겉절이, 뼈째 썰어낸 미주구리 회무침은 술 부르는 봄날의 안주로 제격이다. 그러나 내 오감을 사로잡은 건 촉촉하게 쪄낸 마른 미주구리도 부드럽고 탱탱한 메밀묵도 아닌 작은 옹가지에 담겨나온 물김치였다. 마치 어느 주막에 온 듯 표주박 국자 동동 띄우고 다소곳이 술상의 변방에 나앉은 물김치의 맛에 혹했다. 미나리와 배춧속, 굵직하게 썬 사과와 오렌지가 섞인 국물은 향긋하다. 술꾼들에겐 후식 같은 개운한 맛이다.

갈 길은 갈수록 멀고 팍팍하다. 지나친 시련과 피로, 그러나 결코 성내서는 안 되는 그런 날이거나, 세상은 웃고 나만 우는 듯 느껴질 때 연하 실비의 낡은 미닫이문을 밀어보시라. 그곳엔 아픔 마음 곁에는 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 위로하는 더 아픈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 이유도 알고 나오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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