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석 경북일보 디지털뉴스국장.

시간은 전쟁의 참혹함을 잊게 하지만, 피로 맺어진 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6월 22일, 포항 양포교회 잔디마당에서 열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초청행사는 전우애가 국경을 넘어 세대를 관통하는 힘임을 웅변했다. 100세 노병의 마지막 소원이 이끈 이 만남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역사 인식의 공백과 국제 관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었다.

한국은 지금, 그들의 기억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억을 얼마나 성실히 계승하고 있는가. 1950년 6·25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에 지상군을 파병한 국가였다. 황실 근위대 출신으로 구성된 ‘강뉴 부대’는 253회에 이르는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 이후 이들의 운명은 기구했다. 귀국 후 이들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제국의 앞잡이’라는 낙인을 뒤집어쓴 채 주변부로 밀려났고, 국가의 보호는커녕 생계조차 위협받는 삶을 이어가야 했다.

벨라체우 아메네쉐와(92)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주저 없이 한국을 위해 싸울 것”이라 말했다. 75년 전 낯선 땅에서 흘린 피는 단지 군인의 임무가 아니라, 신념에 가까웠다. 전사자의 딸 마미투 훈데(73)의 삶은 그 희생의 또 다른 단면이다. 아버지를 잃은 채 식모살이로 생계를 이은 그녀는 이번 한국 방문을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라 표현했다. 그 눈물은 감격이 아닌, 지연된 역사적 인정에 대한 인간의 절절한 호소다.

순수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 이번 만남은 정부 예산도, 공식 기획도 없었다. 31년째 참전용사 초청 감사예배를 이어온 양포교회 김진동 목사는 “예산은 기적처럼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계산보다 신념으로, 체계보다 연대로 준비된 이 행사는 외교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국가 대 국가의 공식 절차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6·25 전쟁은 점차 교과서 속 한 챕터로 축소되고 있다. 세대 간 기억의 간극은 커지고, 전쟁의 상흔은 아물었다는 착각마저 팽배하다. 그러나 참전용사들의 귀환은 그것이 착각에 불과함을 증명한다. 고막 수술을 기다리는 노병과, 이석증 치료를 받은 전우의 사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고통이다. 그들에게 한국이 제공한 의료 지원은, 그들이 흘린 피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응답이다.

양포교회 잔디마당에서 이뤄진 이 재회는 어떤 외교 수사보다 진실되고, 어떤 정상회담보다 인간적이었다. 국가 간 이해가 시장 논리로만 정리되는 시대에,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지해 마주 앉은 노병들의 눈빛은 국제 관계가 여전히 인간적 유대를 기반으로 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그것이 비극이 아닌 발전이 되려면, 기억이 필요하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귀환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질문이다. “한국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라는 뜰라운 테세마(100)의 고백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다. 그것은 젊은 날 흘린 피로 지켜낸 땅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현이다. 우리는 과연 그 고향이 되기에 충분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들의 희생에 걸맞은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더 이상 침묵으로는 답할 수 없다.

조현석 기자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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