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여름이 완강하다. 한증막에 갇힌 하루가 참으로 길다. 오만한 태양은 거침없이 본색을 드러내 살아있는 것들의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다. 기세등등한 더위와 면벽하듯 맞서보지만, 열대야에 잠조차 말라 버렸다. 어디로 보나 꽉 찬 푸름과 이글거리는 햇빛, 사나운 열기로 마치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중환자실 같다. 데친 시래기처럼 시들시들하니 생탈이 날 것도 같다. 일상의 긴장과 이완을 벗어나 마음을 내려놓을 쉼과 여유가 없다. 무감각한 신경은 나른해진 육체를 더욱 널브러지게 하고 생기마저 앗아간다. 착하고 반듯하게 살려는 멋진 마음의 여유를 가질 틈조차 주지 않는다. 노트북을 펼치고도 예열하는 데 한참이나 걸리니 하루 글 몇 줄 쓰기도 버겁다. 밤을 지새우다 겨우 새벽을 맞는 사막의 낙타처럼 삶의 끈기와 인내를 시험받으며, 더위와의 한계에 맞서고 있다.

그러나 덥고 습한 날씨에 피는 여름꽃 빛깔이 선명하다. 짙은 초록의 꽃잎들이 바람결에 기대어 그 생명의 찬연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백일홍의 힘참이, 시원스럽게 핀 무궁화의 강인함이, 절정의 숨을 뿜어내는 능소화와 봉선화의 원색이 청량하고 싱그럽다.

동네 작은 카페가 만원이다. 복달더위를 피해 온 동네 할매와 할배들로 빼곡하다. 통유리 너머의 카페는 마치 그 옛날 동구 밖 미루나무 아래 평상이거나 계곡의 너럭바위 같은 현대판 피서처다. 개울물에 발이나 수박 담그는 대신 저마다의 잔에 얼음 가득 넣고 앉아 피서 삼매경이다. 카페 안의 표정들은 다양하다. 새침하거나 뾰족하거나 진지하거나 무심하거나다. 짧은 하루 사막에서 탈출한 단봉낙타의 여유로움이다.

저들은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마트 매장을 기웃거리는 이들이나, 관공서 빈 의자에 잠깐 앉아 땀을 식히는 이들보다 훨씬 밝고 편안해 보인다. 어떤 배려거나 대접의 차원일까. 저들에게도 그들만의 서열이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다. 편하게 허리를 기댈 수 있는 구석진 의자엔 늘 얼굴이 넙데데한 최고 연장자인 듯한 할매가 앉는다. 그 할매 또한 좌정의 리더 인양 다른 이들을 향한 자분자분한 다독임이 인상적이다. 언제나 붉은 꽃을 피우던 칸나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며 마치 수다라는 모이를 앞에 놓은 방앗간의 참새들처럼 속살거린다.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은 시간에 모여 함께하기로 약속이라도 했을까. 저렴한 찻값이라 해도 저들의 카페 방문은 연일 이어진다. 때론 서너 명에서 대여섯이거나 심심찮게 할배들도 여럿 자주 합석한다. 저들은 마치 시답잖은 일상을 고매한 일상으로 바꾼 뒤, 가볍지 않은 경건한 표정에 긍정의 너그러운 얼굴들을 하고 있다. 볼 때마다 마음이 폭신폭신해진다.

저들에게도 여름이 찾아와 여름 속에 울던 어린 시절이 찾아왔을까. 여름이 돌아와 잃어버렸던 과거의 조각들도 돌아왔을까. 어쩌면 그 찾아옴과 돌아옴을 만끽하고 있는지도.

시간 빈곤자인 나는 저들이 부럽다. 냉방이 잘 된 카페라는 공간과 시원한 음료 때문만은 아니다. 어디서든 이 더위에 카페까지 올 수 있는 건강이 허락된 이들이고, 몇 시간씩 함께 있어도 내일 또 만나고 싶어지는 저들이 아닌가. 인생의 고독은 결국 연결의 부재에서 온다. 나는 저들의 노년 행복이 자기 만족적인 행복이 아닌 사회적 품격 있는 행복이라 여기고 싶다. 자기만족을 중시하는 소확행 사람들의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행복은 배가 된다. 품격마저 느껴진다.

여백이 없는 여름이 길다. 계절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일에 대한 태도나 삶의 태도 만큼이나 얼마나 의미 있고 깊이 경험하느냐에 따라 중요하다. 우리, 이 사막의 계절도 온전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뒤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을 찾는 여정의 계절로 가꾸어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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