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달그락달그락, 밤새 게딱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서녘 처마에 등 맞대고 매달린 빈 게딱지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다. 할머니는 오랜 연륜으로 게딱지 소리에서 바람을 읽어낸 뒤 말했다. “태풍 온다. 비설거지 해라.”

내 유년의 할머니는 집안에 들어오는 악귀를 쫓아낸다며 일 년에 두 번, 서녘 처마 밑에 방사(放赦) 목적으로 빈 게딱지를 매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의 몸짓을 읽어내는 훌륭한 바람 자루였다. 게딱지를 흔드는 바람에서 비 소식을 듣기도, 바람이 가는 길과 세기로 날씨를 점쳐 일상을 대비했던 조상들의 지혜였다.

올 이른 봄, 마트 푸성귀 앞에서 만난 훈이 엄마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들의 방문 여닫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단다. 그니는 이미 아들의 불안정한 감정의 변화를 잘 벼린 촉으로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랬다. 그것은 곧 불어올 태풍 전야의 앞바람이었다. 그 고요한 듯 우울한 바람은 곧 불어닥칠 태풍보다 먼저 와 집안 공기를 데우는 중이었다. 그런 뒤 서서히 부풀려 한껏 팽창시킨 뒤, 태풍에 현관문을 열어줄 것이다.

음악을 하겠다며 예고로 진학하려던 아들의 발목을 잡은 건 아버지의 사업 실패였다. 빚쟁이들이 점령한 단칸방에서 아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낸 뒤 진로를 변경했다. 그러나 안으로 짓눌릴수록 더 멀리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아들의 꿈은 외려 팽창해져만 갔다. 마침내 자퇴를 결심하고 잦은 가출로 태풍 전야의 앞바람처럼 항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삶의 위태로움과 비정함을 인정했을까. 아들은 피할 수 없는 길을 수긍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선택에도 도돌이표처럼 다시 돌아와 제 자리에 앉기를 반복하는 중이라 했다.

푸른 이끼가 사라진 숲에 건강한 생명 유지가 어렵듯, 그니는 방황하는 아들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내리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태풍을 맞이하는 모정의 절박함이었다.

햇살이 사납던 요 며칠 전, 다시 만난 훈이 엄마의 푸석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태풍에 맞서 자식을 지켜낸 세상 어미들의 숙명 같은 강인함도 있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자퇴서를 내려 학교에 다녀왔다고 말할 때는, 파르르 눈가에 심한 경련이 일기도 했다. 졸업을 목전에 둔 아쉬운 자퇴지만 절규하기보다 아들의 꿈을 향해 함께 용기 내 견디리라 했다. 아들이 바라는 모양으로 오늘을 살도록 어떤 도움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강고한 어조였다.

황제펭귄들은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에서 어린 새끼들을 지켜내려 허들링을 한다. 동그랗게 겹겹이 붙어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며 안쪽의 약한 새끼들을 보호한다. 안에서 몸을 데운 펭귄은 밖으로 나가고, 밖에서 추위에 떨던 펭귄은 안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쉼 없이 둥글게 돌면서 온기와 배려가 깃든 연대로 펭귄들은 함께 살아남는다.

초원의 풀만큼이나 여리고 작은 우리 또한 자라면서 타인들의 허들링 속에서 보호받았다. 마침내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된 건, 어린 시절에 받은 그 사랑과 지지였다. 사랑받고 존중받고 보호받았던 경이로운 기억, 그 기억들로 살면서 겪는 힘든 고비를 넘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지구의 공전처럼 이어져 보호받았던 존재에서 다시 누군가를 지켜주고 사랑해 주는 존재로 행해지고 있다.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필연적으로 이런저런 부침과 마주한다. 들이닥칠 태풍과 마주하기 전 그 앞바람을 먼저 만나기도 한다. 그 앞바람에 맞서 그저 말미를 달라고 애원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내동댕이쳐지거나 절망으로 등뼈가 갈라지는 아픔을 속수무책 당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조금 덜 아프고 힘들지 않으려 앞바람을 읽어낼 주시와 관찰이라는 면역이 필요하다. 삶의 태풍을 미리 읽어낼 게딱지는 어디 없을까.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