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불교 전통 숨 쉬는 역사와 현재 잇는 다리

사명대사공원길에서 바라본 평화의 탑.
도시의 빠른 시간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어, 경북 김천시 대항면 사명대사길을 찾았다. 이 길은 임진왜란의 격변기 속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승병을 이끌고 싸웠던 사명대사(四溟大師·1544~1610)의 발자취를 따라 조성된 숲길이다. 사명대사의 강직한 정신과 호국의 열정이 배어 있는 이곳은 자연과 역사가 함께 흐르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책처럼 다가온다. 평소 역사와 인물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되새기며 이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김천 직지사 주차장에 설치된 사명대사길 안내표지판.
△숲길에서 만난 사명대사의 숨결.

사명대사길의 입구에 들어서자, 청량한 숲 향기가 깊은숨을 통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도시의 소란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오직 자연의 숨결과 발아래 사각거리는 자갈 소리만이 귀를 채웠다. 길 초입에는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정리한 안내판이 서 있었다. 거기에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자비와 정의’, ‘나라 사랑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명대사는 조선 명종 19년, 경상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유정(惟政)이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열아홉 살에 출가해 학문과 수행에 몰두했는데, 특히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불교 경전뿐 아니라 경세(經世)의 안목을 함께 배우며 큰 인물로 성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의 권유로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던 사명대사는 단순히 한 승려가 아닌 ‘의병장’으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는 해인사, 금산사 등 전국의 사찰을 돌며 승군을 조직했고, 곽재우·정문부 등 의병장과 함께 왜군의 침략을 저지했다. 그가 남긴 ‘호국불교’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사명대사공원.
△길 위에서 되새긴 호국의 정신.

길을 조금 더 걸으니 작은 절터와 낡은 불상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숲 속에 남아 있는 이 유적들은 사명대사가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화를 기원하며 기도했던 장소일 것이다. 그 앞에 서자 자연스레 고개가 숙어졌다. 그가 지녔던 강한 책임감과 자비심을 떠올리니,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역사적 현장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이 깊게 와 닿았다.

사명대사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외교 사절로 떠난 여정이었다. 1604년, 선조는 일본에 억류된 수많은 조선인을 송환하고자 그를 사절로 파견했다. 사명대사는 에도(江戶)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단호한 어조로 포로 송환을 요구했다.

그는 “조선은 작은 나라지만 의리는 크다. 백성은 나라의 뿌리이니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야말로 참된 화해의 길이다”라고 주장했다 전해진다. 결국 그의 담판으로 3천여 명의 포로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명대사와 함께 사진 한 컷.
△사명대사의 사상과 가르침.

길 곳곳의 표지판에는 그의 사상이 담긴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사명대사는 불교의 자비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자비는 백성을 구하고, 정의는 나라를 세운다’는 신념으로 전쟁터에서 승병을 이끌었다. 단순히 참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행동하는 불교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의 시문 중에는 이러한 정신이 잘 드러난다.

“달 밝은 강가에 서니 칼바람이 분다. 백성을 구하는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요, 국토를 지키는 뜻이 곧 참선의 길이다”

이 시는 그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불심(佛心)과 결연한 의지를 잘 보여준다. 사명대사의 굳건한 신념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며, 이 길을 걷는 모든 이에게 ‘역사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 남아 있다.

또한 그는 강직한 선비의 기개와 승려의 청정심을 동시에 지녔다. 그가 남긴 시와 문장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 세상의 부조리를 꾸짖는 통찰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산천은 변치 않으나 백성의 삶은 덧없다. 부디 이 산하를 지키는 것이 참선의 길이요, 깨달음의 길이다’라는 그의 글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사명대가 명상길 탐방안내문.
△자연과 역사가 함께하는 길.

사명대사길은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기에 좋다. 숲 사이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고, 발아래 흙길은 그가 걸었던 길을 닮아 있었다. 다른 탐방객들과 스쳐 지나며 나누는 미소 속에서도 이 길이 품고 있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길의 중반부에 이르자, 숲길이 열리며 산 아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초록의 물결 위로 맑은 하늘이 펼쳐졌고, 그 광경 속에서 삶의 번잡스러움이 사라지는 듯했다. 사명대사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사명대사길 ‘사유의 숲 가는길’ 안내표지판.
△사명대사길이 주는 교훈.

하루 종일 이어진 걸음 끝에, 나는 이 길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역사와 인간 정신을 잇는 통로’임을 깨달았다. 사명대사가 몸소 실천했던 자비와 정의, 나라 사랑의 정신은 여전히 이 길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영웅들을 기억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명대사의 삶을 되새기면, 작은 실천과 책임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승려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조국을 구하고 백성을 지켰다. 그 정신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다.

평화의 탑
△다시 찾고 싶은 길.

사명대사길을 걷는 동안 나는 그의 생애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행동하는 불교’, ‘자비와 정의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김천의 이 길은 바쁜 현대인에게 잠시 멈춰 서서 삶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준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다시 찾아, 사명대사가 남긴 정신을 함께 나누고 싶다. 자연과 역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명대사길은 분명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도심의 소음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와 푸른 숲, 그리고 깊은 역사적 울림 속에서 걷는 이 길은 진정한 힐링의 공간이자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다.

이번 사명대사길 탐방은 나에게 단순한 여행을 넘어 깊은 성찰의 시간이 됐다. 사명대사의 숭고한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길을 다시 걸을 것이다.

역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우리가 걷는 길, 바라보는 풍경, 그리고 그 속에 남겨진 이야기 속에 늘 살아 있다. 김천 사명대사길은 그 사실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소다. 이 길을 걸으며 얻은 평화와 깨달음은 앞으로도 내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김부신 기자
김부신 기자 kbs@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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