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신화나 동화의 이야기가 고립된 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경계 넘어서기’임을 보여준다. 헤라클레스와 같은 그리스의 영웅들은 폴리스의 시민이 아니었다. 영웅이란 법의 테두리에 거주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의 터전인 시민사회를 넘어서 죽음의 세계를 탐험하는 이들이었으며, 죽음의 세계로부터 다시 삶을 길러내는 존재들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부활한다고 믿었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현상으로 영혼이 저승에 가서 심판을 받아 지옥행으로 판정받으면 영원한 죽음이 되고, 선하게 판정받으면 돌아와 부활한다고 믿은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가 재판정에서 만나 심판관 42명 앞에서 42개의 죄목으로, 심문을 거쳐 죄를 부인하게 되면 ‘오시리스’ 앞에서 ‘아누비스(자칼의 머리를 지닌 인간 모습)’가 심장의 무게를 단다. 저울의 한쪽에 심장을 얹고, 다른 쪽에 깃털을 얹어 저울질한다.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유죄로 판결되어 ‘아미트(머리는 악어, 몸통은 사자, 다리는 하마인 동물)’에게 잡아먹혀 죽는다. 죽은 자는 영원히 소멸한다. 무게가 균형을 이루면 부활한다. 얼마나 엄격한 심사인가.

프랑스 노틀담 사원 팀파눔에도 대천사 미카엘이 죽은 자의 영혼을 다는 부조상이 있다. 맨 위층에 심판자 주님. 중간층에 미카엘 천사의 영혼 무게 달기, 아래층에 부활의 나팔. 부활의 나팔 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일어나는 성도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집트 무덤 속의 미라는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 영원히 살기 위한 인간 욕심의 결과물이다. 42명의 심판관에게 42개의 죄를 부인하고 심장과 깃털을 저울질하여 얻은 영혼이 돌아갈 곳이 미라다. 영원히 살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인간의 모습이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심이 다른 모든 욕심을 다 누르고도 남는가 보다. 파라오가 되면서부터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여 심혈을 기울이다 죽어서 완성하게 된단다. 진시황의 불로초와 무엇이 다르랴. 재칼 머리를 한 ‘아누비스’가 벽화 곳곳에서 심장의 무게를 달고 있다. 내 심장의 무게와 깃털의 무게가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욕심의 끝은 어디일까? ‘산승탐월광 병급일호중 도사방응각 병경월역공(山僧貪月光 甁汲一壺中 到寺方應覺 甁傾月亦空)’ 산승이 달빛을 욕심내어 단지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돌아와 비로소 안다네. 단지 기울이면 달 또한 빈다는 것을. 이규보의 영정중월(詠井中月)이란 시다. 진짜 달은 하나밖에 없지만 사람들은 종종 이 시 속의 스님처럼 물에 비친 가짜 달을 탐내곤 한다. 역시 욕심이다. 재물에 대한 욕심도 아니다.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도 아니다. 환하게 물속에 비친 달빛을 탐했을 뿐이다. 그러나 물을 다 쏟아내어도 단지 속에 달은 이미 없었다. 달빛을 탐하는 것도 욕심이라지만, 이 정도면 심장의 무게나 깃털의 무게가 저울 위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욕심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욕심은 밑도 끝도 없는 것 같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이다.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꿈은 정치인으로서 지당한 욕심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뱃속은 시커멓다. 시커먼 욕심이 목구멍까지 찼다. 아예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 없다.

고대 이집트 무덤 속 벽화에서 죽은 이의 심장과 깃털을 저울질하듯이, 정치인은 스스로 심장의 무게를 달아보라. 저울을 하나씩 준비했다가 수시로 저울질하여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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