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의 아픔 딛고 반짝이는 호수 위 기억과 사색의 길
안동호의 잔잔한 수면 위로 길이 열린다. 안동시 도산면 예끼마을에서 출발하는 ‘선성수상길’. 마치 물 위를 걷는 듯한 이 길은 자연과 예술, 역사와 기억을 품고 있다.
‘선성’이라는 이름은 생소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조선시대 예안현의 별칭인 ‘선성현(宣城縣)’에서 비롯됐다. 이 일대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수많은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정신세계를 펼쳐나간 유서 깊은 고장이었다.
수상길이 시작되는 예끼마을은 안동댐 건설의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다. 1976년 안동댐이 준공되면서 옛 예안현의 중심 마을과 수많은 삶의 터전이 수몰됐다.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그들이 새롭게 터전을 잡은 곳이 지금의 예끼마을이다. ‘예술에 끼가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마을 이름처럼, 골목마다 벽화와 미술작품, 작은 갤러리들이 어우러져 있다. 고향을 잃은 상처 위에 예술과 문화로 다시 삶을 일군 마을이라 더욱 특별하다.
선성수상길은 길이 1km, 폭 2.75m의 부교 데크로, 수위에 따라 자연스럽게 뜨고 가라앉는 구조다. 사계절 내내 걸을 수 있으며, 발아래로 반짝이는 호수와 함께 걷는 이는 마치 수면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경험한다. 햇살이 수면에 부서져 은빛으로 반짝이는 순간, 발끝으로 고요가 전해지고, 마음은 어느새 맑아진다.
길 중간에는 과거 예안국민학교가 있던 자리를 기념하는 상징물이 놓여 있다. 풍금, 책상, 흑백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 수몰된 마을의 아이들 웃음소리를 상상하게 만든다.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사라진 고향과 기억을 되새기는 길, 그것이 바로 선성수상길의 의미다.
△선비순례길로 이어지는 깊은 여정
선성수상길은 단독으로도 매력적이지만, 안동시가 조성한 ‘안동선비순례길’ 1코스 ‘선성현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총 13.7km 코스로, 군자마을에서 시작해 보광사, 선성현문화단지, 선성수상길, 안동호반자연휴양림을 거쳐 월천서당에 닿는다.
출발지인 군자마을은 500~600년전 광산김씨 농수(農叟) 김효로(金孝盧)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안동 부사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오천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한 말에서 연유하여 군자 마을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오천유적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일명‘외내’라고 불리운다.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고, 2km 떨어진 지금 위치에 마을의 가옥과 정자 등을 그대로 옮겨왔다.
조선시대 전기부터 끊임 없이 많은 학자들을 배출해 낸 군자마을은 그 분위기에 걸맞게 매우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이다. 광산김씨 군자마을 종중의 종가인 후조당,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인 김유의 고택, 탁청정 등 20여 채의 고택 등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보광사가 나온다. 깊은 숲길 속에 자리한 이 사찰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고즈넉한 분위기 덕분에 방문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숲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바람,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어우러져 걷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이후 만나는 선성현문화단지는 옛 예안현 관아를 복원한 전시관과 체험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는 선비들의 생활과 가르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붓글씨를 써보거나, 다례를 배우며 ‘선비의 하루’를 경험하는 순간,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배우는 시간이 된다.
△수상길과 자연휴양림, 그리고 월천서당
선성수상길을 지나면 안동호반자연휴양림이 펼쳐진다. 소나무 숲 속 산책길과 통나무집 숙소가 조성돼 있어 가족 여행객이나 힐링을 원하는 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특히 새벽녘 물안개가 호수 위에 피어오르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다. 하루쯤 머물며 자연의 품에 안기면, 선비들이 추구했던 ‘자연과의 합일’이 무엇인지 몸소 느낄 수 있다.
여정의 끝은 월천서당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권벌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서당 마당에 앉아 안동호를 내려다보면 왜 이 길이 단순한 관광길이 아니라 ‘되새김의 길’인지를 알 수 있다. 권벌은 절의를 지키고 학문을 넓히는 데 힘쓴 인물로, 퇴계학맥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그의 발자취는 오늘날에도 학문과 도덕의 균형을 생각하게 한다.
△길이 품은 역사와 기억
선성수상길은 단순히 호수 위를 걷는 산책로가 아니다. 그것은 수몰로 사라진 마을을 기억하는 길이며, 선비 정신을 현재로 이어주는 길이고,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문화의 길이다. 물 위에 길을 내어 걷는다는 행위는, 곧 시간의 강을 건너 과거와 현재를 잇는 행위다.
특히 이 길에는 안동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안동은 유교문화의 본산으로, 선비 정신과 학문을 지켜온 고장이자 수몰이라는 아픔을 예술과 문화로 승화시킨 곳이다. 선성수상길은 그런 안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걷게 하는 공간이다.
가을빛이 깊어가는 계절, 선성수상길을 걸어보면 발아래 반짝이는 호수와 길 위에 스민 선비의 마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어느새 걷는 발걸음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사색이 되고, 그 길 끝에는 ‘잃어버린 것’과 ‘이어가야 할 것’이 함께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