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재 숨쉬는 간이역, 느림이 머무는 마을을 걷다

▲ 군위 화본역.(우측 기차 옆에 우뚝 쏟은 급수탑이 보인다)
▲ 군위 화본역.(우측 기차 옆에 우뚝 쏟은 급수탑이 보인다)

“옛 정취와 사람 사는 온기가 만나는 길”

대구 군위군 깊은 산골짜기, 기차가 멈춰선 작은 간이역이 있다. 1938년 문을 연 화본역(花本驛).

중앙선 복선전철 개통으로 2024년 12월 공식 폐역됐지만, 역은 사라지지 않았다. 군위군은 국가철도공단·한국철도공사와 협의해 역과 부지를 임대하고, 주민과 관광객에게 무료 개방했다. 그 결과 화본역은 ‘잊힌 역사’가 아닌 ‘머물고 싶은 시간’을 품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 군위군-대구광역시, 대구시 편입지도.
▲ 군위군-대구광역시, 대구시 편입지도.

군위군은 2025년 8월, 코레일과 8개 지자체(구례군, 고흥군, 장흥군, 강진군, 해남군, 의성군, 봉화군, 예산군) 가 참여한 ‘철도 활용 관광 활성화 공동 협약’에 서명했다.

군위역과 연계한 시티투어, 관광 인센티브, 철도 운임 지원사업을 통해 관광객 유치에 본격 나선 것이다.

빠른 속도의 시대에 ‘느림’을 관광 콘텐츠로 재해석하며, 화본역은 새로운 지역관광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어느 날, 기자는 화본역 일대를 걸으며 역사와 사람, 그리고 느림의 가치를 되새겨봤다.

▲ 군위 화본역 광장 옆 레일카페, 기차를 카페로
▲ 군위 화본역 광장 옆 레일카페, 기차를 카페로

△ 간이역의 고요한 아침.

플랫폼에 서면 시골 특유의 정적이 감돈다. 열차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역무실 창문이 덜컥 흔들리고, 마을 주민과 여행객이 잠시 뒤섞인다. 주변에는 1930~40년대 지어진 옛 철도 관사촌이 여전히 남아 있어 철도 마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증기기관차 급수탑은 화본역의 상징이다.

한때 기관사들이 물을 보충하던 이 탑은 이제 과거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아이들은 모자와 조끼를 입고 ‘기관사 체험’을 하며 즐거운 추억을 만든다.

▲ 폐교된 구. 산성초등학교에 마련된 ‘아빠엄마 어릴적에’
▲ 폐교된 구. 산성초등학교에 마련된 ‘아빠엄마 어릴적에’

△ 폐교, 시간과 기억이 공존하는 공간.

역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는 구 산성중학교가 있다. 현재는 ‘엄마 아빠 어릴 적에’라는 생활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1960~70년대 교실을 재현한 공간에는 양은 도시락, 추억의 학용품, 빨간 딱지가 전시돼 있다.

▲ 대구 군위군 산성면 화본역 인근에 있는 폐교(구 산성중학교)에 마련 ‘아빠 엄마 어릴적에’
▲ 대구 군위군 산성면 화본역 인근에 있는 폐교(구 산성중학교)에 마련 ‘아빠 엄마 어릴적에’

방문객들은 부모 세대의 삶을 체험하며 웃음과 회상을 나눈다.

이곳에서는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딱지치기 등 전통 놀이도 즐길 수 있어 세대 간 공감의 장이 마련된다. 노인들이 직접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살아 있는 역사 수업이 된다.

△ 사람 냄새가 풍기는 골목과 카페.

화본역 인근 골목은 단순한 상권을 넘어선다. 은퇴 교사 부부가 운영하는 책방에는 낡은 교과서와 지도, 사진이 가득하다.

청년들은 직접 농산물을 가공해 판매하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여행객과 주민은 자연스레 마주쳐 따뜻한 차 한 잔과 담소를 나눈다. 길 위에서의 소소한 만남이 곧 이 마을의 진짜 매력이다.

△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

화본철도문화관은 근대 철도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철길과 함께 성장한 마을의 이야기, 증기기관차와 급수탑의 의미, 산업화 과정 속 주민들의 삶이 차례로 펼쳐진다. 매년 가을 열리는 ‘화본마을 축제’는 주민과 여행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장이다. 논밭과 철로가 맞닿은 풍경 속에서 전통과 현재가 이어진다.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는 화본역을 중심으로 인각사, 화산마을, 삼국유사 테마파크,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 사유원(수목원), 돌담마을 등으로의 접근성도 뛰어나다. 하루 일정으로 철도문화와 자연, 전통을 모두 체험할 수 있다.


▲ 매년 열리고 있는 ‘화본마을 축제’
▲ 매년 열리고 있는 ‘화본마을 축제’

△ 걷는 길에서 만나는 즐거움.

화본역에서 시작하는 3.5km 산책 코스는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코스는 화본역 플랫폼(출발) → 옛 철도 관사촌(500m) → 책방·전시관 골목길(1km) → 화본철도문화관(700m) → 화본마을 회관·들길(1km) → 화본역(도착) 순이다.

완만한 길이라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좋다. 곳곳에 포토존과 쉼터가 마련돼 발걸음을 붙들고, 계절별 농촌 체험도 준비돼 있다. 떡메치기, 엿 만들기, 감 따기, 논두렁 걷기, 기관사 복장 촬영 등이 여행객을 기다린다.

△ 정겨운 먹거리, 느림이 곧 쉼이 되는 마을.

화본역 앞 카페에서는 쑥개떡, 감잎차, 옛날 아이스케이크를 맛볼 수 있다. 마을 식당의 시래기 된장국, 메밀 묵밥, 군위 사과 디저트도 인기다.

특히 역 인근 초대형 카페 ‘스틸 301(STEEL 301)’은 1만7800㎡(5400평) 규모로 조성돼 관광객 발길을 붙든다. 커피와 베이커리를 즐기며 주변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다.

군위군은 지난 26~28일 ‘낭만플랫폼 화본축제’를 열어 공연·체험·장터를 선보였다. 그러나 화본역의 진정한 매력은 이벤트가 아니라, 플랫폼을 울리는 기적 소리, 골목마다 배어 있는 주민의 삶, 그리고 걷는 길에서 느껴지는 소박한 온기다.

▲ 영화 리틀포레스트 촬영지
▲ 영화 리틀포레스트 촬영지

△ ‘느림’이 주는 힐링.

작은 간이역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사람·일상이 어우러진 화본마을은 지역 관광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빠름만을 좇는 시대에, 이곳은 ‘느림이 곧 쉼’임을 일깨운다.

과거를 품고 현재를 살아가는 화본역에서 방문객들은 잠시나마 삶의 속도를 늦추며 마음 깊은 곳의 여유를 만끽한다.

화본역은 철도 동호인들 사이에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꼽히며 대구 근교 대표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이 작은 역은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김진열 군위군수는 “화본역사와 철도 구간에 ‘간이역’을 테마로 한 관광자원과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해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누구나 편하게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갈 것”이라며“화본역이 명실상부 군위의 대표 관광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한편, 화본역은 KBS 1박 2일, MBC 손현주의 간이역, 영화 리틀포레스트, 드라마 조립식 가족, 닥터슬럼프, 화양연화 등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예능프로그램의 배경이 될 정도로 전국적인 명소로 자리 잡아 왔다.

이만식 기자
이만식 기자 mslee@kyongbuk.com

군위 의성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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