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욱 논설주간
▲ 이동욱 논설주간

조선은 실록을 목숨처럼 지켰다. 전쟁과 반란 속에서도 역사를 보존하려는 집념은 사고(史庫) 제도에 응축돼 있다. 조선 왕실 본관지인 전주(全州) 사고본이 임진왜란을 피해 겨우 살아남아 우리는 오늘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수 있다. ‘귀중한 기록은 분장한다’는 원칙은 단순한 문서 보관이 아니라 국가 존망의 문제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화마와 외적을 피해 강화 정족산,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평창 오대산 깊은 산중에 사고를 분산하는 필사적 조치를 취했다. 사고를 지키는 승군과 수호사찰, 정기적으로 바람 쐬고 볕에 말리는 포쇄를 하는 등 종교적 차원까지 끌어올린 집단적 의식에 가까웠다.

실록을 여러질이나 찍어 나눠 둔 선조들의 지혜에 비하면 지금 정부의 국가정보관리 체계는 허술하기 짝이없었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647개의 국가 디지털 행정망 시스템이 멈췄다. 정부24, 주민등록, 보훈·재난 포털까지 줄줄이 먹통이 됐다. 정보의 안전은 곧 국가의 안전이다. 전산망은 오늘의 실록이자 데이터센터는 현대의 사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보 기록은 불탄 뒤에는 다시 복구할 수 없다. 400년 전 깊은 산중에 사고를 지어 역사 기록을 지켰듯 데이터의 실시간 분장과 시스템 이중화(쌍둥이 서버)를 넘어 삼중 안전조치가 필요하다.

정부는 매번 큰 사고 뒤에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겠다 외치지만 예산은 늘 ‘장기 과제’라며 뒷전으로 미룬다. 이번 사고로 시스템 안전을 위한 분산예산이 없는 데다 주기적 백업조차 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위기는 화재에서 비롯됐지만 진짜 원인은 ‘기록을 지키려는 철학의 부재’다. 조선시대 사고처럼 국가정보를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본원은 물론 대구와 광주의 정부통합전산센터에 각각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뿐 아니라 지방 자치단체와 기업도 국가정보관리원 화재를 교훈 삼아야 한다.
 

이동욱 논설주간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