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와 노을 물든 낙동강변, 자연 따라 가을의 끝을 걷다

▲ ‘매학정 낙동강 생태숲 길’은  매학정에서 강병으로 내려와 수변테크길로부터 시작된다.
▲ ‘매학정 낙동강 생태숲 길’은 매학정에서 강병으로 내려와 수변테크길로부터 시작된다.

가을이 깊어간다.

바람엔 차가운 기운이 묻어나고, 나뭇잎은 하루가 다르게 색을 달리한다. 그런 날이면 사람은 본능처럼 걷고 싶어진다.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발길 닿는 대로 자연의 품속을 거닐며 계절의 결을 느끼고 싶어진다.그럴 때 떠오르는 길이 있다. 구미시 고아읍 ‘매학정 낙동강 생태숲 길’. 낙동강을 따라 굽이도는 이 길은 늦가을의 정취가 가장 짙게 스며 있는 곳이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고, 붉은 노을이 강물 위로 스며드는 그 시간, 걷는 이의 마음도 함께 물들어 간다.

▲ 매학정에서 고아파크골프장 가는 길. 길 옆에는 이름도 모르는  강변 식물들이 길을 따라 자라고 있다,
▲ 매학정에서 고아파크골프장 가는 길. 길 옆에는 이름도 모르는 강변 식물들이 길을 따라 자라고 있다,

△ 정자에서 시작되는 시간의 길, 매학정.

매학정(梅鶴亭)은 조선 중종 28년(1533)에 지어진 정자다. 매화를 사랑하고 학을 벗삼았던 선비들의 고즈넉한 정신이 깃든 곳. 원래 상정공 황필의 휴양지로 지어진 이 정자는 그의 손자 황기로가 다시 세우고 ‘매학정’이라 이름 지었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자연과 벗하며 글을 쓰고 서예를 즐기던 그는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 물 억새, 갈대, 스크렁(꽃말: 가을의 향연) 등 강변 식물들이 바람에 흔 날리고 있는 모습.
▲ 물 억새, 갈대, 스크렁(꽃말: 가을의 향연) 등 강변 식물들이 바람에 흔 날리고 있는 모습.

낙동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자리한 매학정에 오르면, 강물의 잔잔한 흐름과 함께 억새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은은한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처마 끝에 매달린 햇살이 강물 위로 쏟아진다. 그곳에서부터 오늘의 여정이 시작된다.

▲ 잘 정비된 매학정 수변테크 길
▲ 잘 정비된 매학정 수변테크 길

길은 왕복 9km. 매학정에서 출발해 고아파크골프장 인근의 버드나무 군락지를 지나, 다시 매학정으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형 코스다. 낙동강을 따라 평탄하게 이어져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좋은 길이지만, 그 발끝에 닿는 감동은 단순한 산책로의 그것과는 다르다.

▲ 길을 가르쳐주는 갈대 들.
▲ 길을 가르쳐주는 갈대 들.

△낙동강의 속삭임을 따라.

매학정을 지나 수변 데크로 접어들면, 강물의 숨소리가 가까워진다. 물결이 잔잔히 부딪히며 내는 리듬은 마치 오래된 자장가처럼 평화롭다. 강 위를 스치는 새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고, 멀리 들판에서는 볏짚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온다.

▲ 수변테크길 끝에서부터 강변길로 접어들면 버드나무들이 반겨준다.
▲ 수변테크길 끝에서부터 강변길로 접어들면 버드나무들이 반겨준다.

길가의 버드나무들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들이 서로 부딪히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발걸음을 멈추면, 낙동강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흔들리고, 그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세상은 잠시 멈춘 듯 고요하고, 오직 자연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고 있는 듯하다.

강정 배수장을 지나면 들판이 펼쳐진다. 추수를 마친 논에는 볏짚이 가지런히 쌓여 있고, 가을 햇살이 그 위를 부드럽게 감싼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들녘에는 오히려 살아 있는 자연의 냄새가 가득하다. 바람이 들풀을 흔들고, 먼 하늘에서는 철새의 울음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 저 멀리 낙동강 제방에서 부터 노을이 오고 있는 갈대 밭
▲ 저 멀리 낙동강 제방에서 부터 노을이 오고 있는 갈대 밭

△억새와 노을이 만든 환상의 풍경.

길이 깊어질수록 억새의 물결이 드넓게 펼쳐진다. 하얀 솜털 같은 억새가 바람을 받아 출렁이는 장관. 햇빛을 머금은 억새는 순간 금빛으로 번쩍이며, 마치 황금 파도가 밀려오는 듯 눈부시다.

억새는 가까이서 보면 단단한 줄기와 부드러운 꽃차례가 공존한다. 거칠면서도 섬세한 그 모습은 마치 가을의 이면을 닮았다. 계절의 끝에서 생명을 지탱하는 강인함, 그리고 이별의 순간조차 아름다운 부드러움. 억새밭을 지날 때면 누구나 마음이 잠시 멈춘다.

해가 서쪽 산등성이로 기울 무렵, 낙동강 위로 붉은 노을이 퍼진다. 강물은 그 빛을 고스란히 반사하며 금빛으로 물든다. 억새의 하얀 솜털도 노을빛을 머금어 주홍빛으로 변하고, 그 위를 스치는 바람은 마지막 춤을 추듯 부드럽게 일렁인다.그 순간, 세상은 붉은빛과 금빛이 뒤섞인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시간마저 숨을 죽인 듯하다. 억새의 잎들이 서로 스치며 내는 소리는 가을이 연주하는 마지막 음악처럼 들린다.

▲ 벌써 갈대 밭까지 노을이 다가와 있는 모습.
▲ 벌써 갈대 밭까지 노을이 다가와 있는 모습.

△ 가을의 끝에서 만나는 위로.

해가 완전히 저물 무렵, 다시 매학정으로 향하는 길.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자 강물 위에는 은빛 달빛이 번진다.하루를 온전히 걸은 뒤 매학정에 서면, 마음속에는 묘한 따뜻함이 피어난다. 걷는 동안 세상의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자연의 시간만이 흐른다.

매학정의 처마 끝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의 그림자, 그리고 강 위로 떠오르는 별빛 한 점. 모두가 늦가을의 선물처럼 다가와 마음 한켠을 조용히 채운다.

▲ 산모퉁이 매학정으로 돌아오는길,
▲ 산모퉁이 매학정으로 돌아오는길,

△걷기의 끝, 그리고 추천.

‘매학정 낙동강변 생태숲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조선의 정자문화, 낙동강의 생태, 그리고 가을의 서정을 함께 품은 길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담백하고 진솔하다.억새의 바다를 지나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 노을 속을 걸으며 오늘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자연은 묵묵히 계절을 바꾸고, 사람은 그 안에서 잠시 쉼을 얻는다.

가을의 끝을 붙잡고 싶다면 오후 4시 이후, 노을이 물드는 시간에 이 길을 걸어보자.하얀 억새는 바람에 춤추고, 낙동강은 금빛 노을을 품는다.그 길 위를 걷는 동안 세상은 잠시 멈추고, 마음은 천천히 흐른다.

“노을이 내리고 억새가 춤추는 그 길,가을을 걷는다는 건 결국 마음을 걷는 일이다.”

하철민 기자
하철민 기자 hachm@kyongbuk.com

부국장, 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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