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지나간 과거는 현재의 나침반이라 한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고,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난 1일(토요일), 한 APEC 회원국이 주최한 감사만찬에 참석했다. 저녁 6시 30분 시작이라 오후 4시 30분에 시청을 나섰다. TMAP은 소요시간 18분을 가리켰다. 혹시 모를 교통 통제를 피하려는 계산이었다. APEC 기간 내내 보문단지를 오가며 체득한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보문 초입에서 차량들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춰 섰다. 도로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까만 차량 두 대가 깜빡이를 켜며 진입을 시도했지만, 굳게 닫힌 바리케이트는 열리지 않았다. 경찰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이동 중이라 보문단지 전체가 전면 통제됐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꼬박 한 시간 반을 기다린 듯하다. 긴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APEC 기간 동안 경주시민들이 보여준 시민의식은 놀라웠다. 시장님을 비롯해 시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APEC 성공 개최를 위해 힘을 모았다. ‘APEC 클린데이’, ‘시민대학 운영’ 등 ‘APEC’의 머릿글자를 단 다양한 운동이 도시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작년 2월, APEC 유치를 위해 ‘경주애(愛) 글로벌 공무원 서포터즈단’을 발족했다. 이름 그대로, 경주를 사랑하고 외국어에 능통한 공무원 그룹이다. 정상회의를 앞두고 APEC 지원단이 서포터즈단을 외신기자 숙소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자들의 손과 입이 되어줄 현장 통역·안내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포터즈단은 7개 거점호텔에 배치되어 활약했다. 한 미디어 숙소를 찾았을 때 자원봉사자와 전문요원 모두 “서포터즈단이 없었다면 쏟아지는 질문에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감탄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대부분 경주 출신이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21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미국과 중국이 양대 축을 이룬다. 이번 회의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참석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상회의를 앞두고 평소 친분이 있던 중국 외교관에게 전화가 왔다.
“시진핑 주석께 경주 홍보 영상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DVD로 받을 수 있을까요?”
이미 영상 파일은 전달한 상태였다. 이제 DVD는 제작하지 않기에, USB에 담아 틀어드리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꼭 DVD여야 한다”고 했다.
서울의 영상 제작업체에 전화해 DVD 제작을 부탁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지역의 영상제작소에도 연락했다. 사장님은 “힘들겠지만 해보겠다”고 했다. DVD 공테이프는 중국 대사관에서 직접 공수됐다.
결국 시 주석 도착 전, 완성된 DVD가 외교관의 손에 전달됐다. 다음 날 서울 업체에서 “DVD 제작은 힘들겠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경주시민이 보여준 저력(底力)은 지면에 다 담기 어렵다. 고구마 줄기를 캐면 줄줄이 이어지듯,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경주가 있었기에 이번 APEC은 성공했다.
APEC 개최지로 경주를 택한 것은, 실로 ‘신의 한 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