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淸明)한 가을볕이 천지 가득하다. 바람결도 깊다. 정갈한 듯 반짝이는 그 볕에 단절음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시작도 끝도 어찌할 수 없음을 기다림이라 했던가. 저릿하게 스며드는 간절함, 막힌 듯 들숨 같은 막막함, 끊어진 실 같은 무력감으로 가을을 기다렸다. 마침내 맹렬한 더위가 훑고 지나간 뒤 푹푹 젖은 숨소리와 생각, 끓어오르는 감정도 식고 있다. 나를 겸허한 온도로 바꾸고 애상을 넘어 존재의 실상을 관찰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이렇듯 볕이 고운 날엔 바람 따라 걷는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여유와 설렘은 걷기의 묘미라, 가을 색이 냄새를 품고 냄새가 색을 품은 강변을 걷는다. 습습한 강바람이 사붓대며 앞선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짜랑짜랑한 햇살과 바람결에 안겨 오는 짙은 풀냄새에 전신을 적셔 포쇄하듯 걷는다. 일렁이는 잔물결에 무지근하던 마음을 흘려보내니 속절없이 순정해진다. 먼 길 떠나는 작은 새들의 바쁜 몸짓엔 자유롭게 흐르는 생명의 리듬이 흐르고, 바람에 실려 오는 흙냄새와 들녘의 벼 향이 섞여 가을의 감각을 깨운다. 지난여름의 눅진함과 습(濕)을 흔드는 이 움직임은 내 안의 소란스럽고 엉성궂었던 마음을 쓰다듬으며 멈춰 있었던 사유를 다시 흐르게 만든다. 덩달아 고여있던 감정의 찌꺼기마저 털어내 가벼워진다.
내 언어가 딱딱하다고 느껴졌을 때, 각져 튕길 때, 무작정 걷는 이 시간은 내가 나의 본질을 다시 써내려 가는 조용한 다짐이다. 마치 고독을 내 안에 들이는 의례처럼 보이지만 청아한 가을빛이 씻기듯 스며들어 굳어버린 내 안의 신념을 적셔 부드럽게 만든다. 잠잠히 흘려보내는 그 시간 또한 내게 다시 부드러움을 주고 기억을 되살린다. 그때, 홀로 있는 법을 다시 배우며 세상을 본다. 소리를 듣고 날씨를 만지며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도. 내면에서 울리는 지속의 선율에 귀 기울이다 보면 세상과 한 몸이 되기도 한다. 정화한 그 시간이 있어 나는 오늘도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한 문장을 쓴다. 반드러운 모양새로 글의 온도를 바꾸고, 열의와 의욕으로 다시 채워 글 쓰는 이로써 바르고 깨끗한 마음과 진실한 사명감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하기도 한다. 하여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살아갈 힘을 주는 기억 하나 만들기도, 어떤 마음가짐을 우리 감정의 물결 안에 스미듯 안착시켜 주기도 하니 감사하리.
잠시 걸음을 멈춘다. 저기 일용할 양식으로 나를 먹여 키워 준 섬 안 들녘. 안온한 눈빛으로 가을볕에 당신의 수의를 포쇄하는 어머니를 본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는 행여 좀이 슬세라 갈무리하던 수의를 꺼내 바스러진 담뱃잎을 털어낸 뒤, 바람에 쐬고 볕에 말렸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가는 길 마음껏 호사를 누려보고 싶었을까. 손수 준비한 오방색 저고리에 물빛 고운 본견 치마 한 벌, 그리고 복숭앗빛 명주 두루마기 수의가 화려하다.
누리끼리한 무채색의 치마저고리는 평생 당신이 좋아서 즐겨 입는 옷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어머니도 빛깔 고운 옷 좋아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 화려한 수의에 우련한 눈빛 주던 어머니의 모습도 따라왔다. 어머니가 떠나신 가을이 가고 겨울도 봄도 그곳에 머물다 갔다. 가깝기에 무성의했고 늘 그 자리에 계실 것이기에 유예해도 되는 줄 만 알았던 어머니라는 존재. 그러나 이제 와서도 무어 그리 달랐으랴. 정녕 어머니라는 이름은 눙쳐도 에인 것을. 침잠하며 스스로 삭여야 하는 안개처럼 젖어 드는 회한인 것을.
존재의 시작은 ‘텅 빔 속의 충만’으로 비롯된다. 내 것이 아니었던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더 내 것으로 소유하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때론 포쇄라는 소소한 방식으로 그 아쉬움조차 비워내고 본질만 남은 ‘참 나’로 돌아가 선명해진 자신의 정갈한 매무새를 보라.
내면의 고요부터 다스린 탓일까. 그 깊어짐으로 얻은 자연과의 교감과 내면의 평화로 내 글의 한 문장에도 여백이 생겼다. 그 빈 곳에 더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다가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