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의 효심 깃든 금단의 땅, 반세기 만에 침묵 깨다
효릉은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6세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 12월에 즉위하였으나 이듬해 8월 승하하였고 인성왕후와의 소생은 없다. 재위 기간이 8개월로 조선 역대 최소로 재위한 왕이다. 인성왕후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1524년인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인종 승하 후 32년을 자녀 없이 홀로 살았다.
장경왕후는 인종 출산 후 6일 만에 승하했고, 이에 인종은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인종은 세자 때부터 인품이 남다르고 효심이 지극했다. 인종실록 2권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평시에 눕거나 기대어 피로해 졸은 적이 없고, 늘 바로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서생(書生) 같았고, 아플 때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인종의 효심을 알 수 있는 야사가 있다. 인종이 세자 때 거처하는 동궁에 불이 났다. 순식간에 불이 번지자,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의 짓임을 직감했지만 자신을 길러준 그녀의 뜻을 어기는 것도 불효라 생각해 꿈쩍않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밖에서 중종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계모에게는 뜻을 따르는 것이 효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라 생각해 불길을 뛰쳐나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1543년 2월 24일 1번째 기사)을 보면, 덕지(德只)라는 궁녀가 목면(木綿)을 불난 방에 보관해 두고는 밤에 가 살펴보다가 실수로 등불을 떨어뜨려 불이 난 것이며, 불이 나자 중종이 젊은 환관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보니 세자가 스스로 불을 피하여 밖에 나와 앉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사의 이야기는 인종의 효심을 생각하는 민초들의 애잔한 마음이 와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정왕후는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20년 동안 세자(인종)의 방패막이로 자임하며 친아들만큼이나 아꼈다. 그러나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후 34세에 아들을 낳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동안 보살펴준 세자를 끌어내리고 아들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외척들을 내세웠지만 중종 승하 후 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병약한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사망한 것이다. 실록에서는 인종이 부왕 중종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아버지인 중종이 병이 나자, 인종은 옆에서 밤낮으로 갓과 띠를 끄르지 않고 음식 먹는 것도 금해 몸이 몹시 수척해졌다고 한다. 또한 중종이 사망하자 머리를 풀고 맨발로 뜰 밑에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고, 다섯 달 동안 계속 곡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선왕의 장례를 치르느라 몸이 허약해진 인종은 음력 5월의 폭염에 시달려 병석에 눕고 말았으며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8월 17일 승하했다.
인종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결정된 사유는 효심이 지극했던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 “내가 우연히 병을 얻어서 부왕께 끝까지 효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부왕과 어머니 장경왕후가 계신 정릉 근처에 내 묘를 써야 한다. 또한 내 장례는 소박하게 해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별다른 이견 없이 동원이강릉 형태인 부모님 오른쪽 언덕 위에 간좌곤향의 남서향 방향으로 능을 조성하고,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으로 정해졌다. 32년 후 인성왕후가 승하하면서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효릉은 현무봉에서 취기(聚氣)한 가운데 맥이 강하게 입력되어 형성된 자리이다. 백호사(白虎砂)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입체를 형성하면서 일시 이탈하여 백호 쪽에 골이 생겼고, 거기서 발원한 수세는 백호 끝으로 돌아나간 형태이다. 다행히 능 앞에 연지를 조성하여 수기(水氣)의 이탈을 막고 있다. 청룡은 현무봉에서 시작하여 혈장을 원만하게 잘 감싸고 응축하고 있다. 이 청룡이 혈장을 응축하여 혈장의 청룡 선익이 후부하고 강하다. 효릉은 백호에 비하여 청룡이 더 발달한 터라고 볼 수 있다. 효릉 정자각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독수리 머리인 취두(鷲頭)가 설치되어 있다.
1960년대 후반 효릉 능역에 축산 농가에 젖소 종자를 공급하는 젖소개량사업소가 자리 잡았다. 젖소개량사업소의 세균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효릉은 일반 관람객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으며, 학술 연구를 위한 접근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출입이 가능한 금단의 땅으로 전락했다. 반갑게도 정부와 문화유산청은 53년 만에 빗장을 풀고, 2024년 9월 8일부터 일반인에게 소독 등 약간의 절차를 거치지만 공개하고 있다.
조선 왕실에서는 태반과 탯줄을 의미하는 태(胎)가 아이의 운명과 함께하고, 나아가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고 왕손의 태를 소중히 보관하였다.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여 태실지의 땅을 파 아기 태실을 조성하였고,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의 격을 높이기 위해 난간석과 비석 등을 추가로 설치하는 가봉(加封)을 하여 태실(胎室)이라고 하였다. 은해사 인근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중종 16년 1521년 인종의 아기 태실을 조성했으며, 명종 1년 1546년 아기 태실을 가봉한 인종 태실이 있다. 하인수 경주대학교 특임교수·문학박사(풍수지리 전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