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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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거야?
가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거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거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거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감상] 마종기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내가 시인이었을 때』가 출간됐다. 신작 시집에서 소개할 시를 고르려다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지, 1980)에서 ‘대화’를 골랐다. 한일회담 반대 서명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고초를 겪고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나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간 마종기 시인의 신산(辛酸)한 삶이 투영된 시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라고 고백한다. 아니, 기도한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계절, 가을이다. 노시인의 새 시집을 추천한다. <시인 김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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