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정적이 실내를 무겁게 누른다. 엄숙하다 못해 신령스런 기운까지 느껴진다.
“개반(開盤) 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긴장된 표정의 장인이 개반을 선언한다. 그리고 천천히 흰 천을 오른쪽부터 걷는다. 천 년의 시간이 멈춘 황금빛 바둑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삿됨을 피해 새벽에 대국장으로 옮겨진 바둑판은 신비한 기운을 내뿜는다. 이어서 은은한 향을 바둑판 위에 올리며 예를 갖춘다. 그리고 검은 돌을 잡은 기사가 바둑판 한가운데, 천원 자리에 돌을 놓는다. 착수예식이다. 깊고 청아한 소리가 정적을 깬다. 바로 비자 바둑판이 내는 소리, 비자음이다.
눈보라와 비바람을 천년이나 견디며 내면을 다져 온 비자나무. 이 비자나무 바둑판이 내는 소리가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기사들의 정신을 맑게 해 명국이 탄생한다는 믿음이 있다.
일본 최고 기전인 명인전과 기성전 결승대국에서는 비자나무판을 쓴다. 바둑돌이 놓일 때 표면이 살짝 들어가지만 금방 복원된다. 흔적이 남지 않는다. 소리, 향, 색감이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바둑판이다. 국내 주요 대회 때도 비자나무 바둑판이 쓰인다.
지난 1일 경주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은 많은 화제를 남겼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선물한 ‘본비자 바둑판’이 관심을 끌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 자생하는 비자나무 중 미야자키(宮崎)현 등 일본 남부지역에서 나는 비자를 본비자라 부른다. 무늬가 일정하고 사용할수록 진홍색으로 익어간다. 최고로 꼽힌다.
시 주석의 바둑 실력은 아마 5단으로 알려져 있다. 고수다. 그는 지난 2014년 방한 때 양국 관계를 바둑에 비유했다.
“한·중 관계는 서로 다른 수를 두더라도 큰 판을 함께 만들어가는 두 기사와 같다.” 공동번영이 키워드다. 비바람은 비자에게 장애가 아니었다. 결을 단단하게 해 명국을 낳는 촉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