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일상을 기대하기 힘든 계절인 것 같다. 고3을 둔 가정은 수능시험 결과로 절망감에 잠겨있다. 최상위권을 위한 변별력 지향이 오히려 역대 ‘불수능’을 몰고 왔다. 지향점에 따른 결과가 오류임에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십수 년의 학업이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되는 현실에서 절망감으로 시작하는 수험생들이 안타깝다. 이마저도 폭주하는 여의도 정치에 묻히고 있다. 개혁을 앞세운 민주당의 모습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다. 검·경의 수사권 분리로 변죽을 울리더니 이제는 검찰청 폐지에 이어 검찰 파면, 검사장의 평검사로의 강등 조치를 강행하고 있다. 더불어 대법관 증원 및 재판 소원이 포함된 5대 사법 개혁안을 몰아붙이고 있다.
자동차 운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연일 사회면을 장식하는 대형 사건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빠질 수 없는 것은 과속이 불러온 사고다. 수많은 사상자를 불러오는 참사이기에 문명의 이기가 어느새 ‘살인 무기’로 변하고 있다. 운송의 편의성이라는 지향점이 오히려 ‘인위적’ 생명 단축을 불러오는 아이러니로 발전했다. 급발진 문제로 ‘자동차가 죗값’을 받아야 하는 대형 사고조차 운전자의 조작 미숙과 과속임이 밝혀질 때 허탈함을 감출 수 없다.
터널시야 현상(Tunnel vision effect)이란 말이 있다. 마치 터널 속에서 앞만 보는 것처럼 중앙의 시야만 남고 주변 시야가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심리학에서는 특정 문제나 원인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그르치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일컫는다. 우회하는 번거로움과 시간을 줄여주는 터널의 유용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고비에 부딪힐 때 터널 끝 빛은 해결의 환희와 다름없다. 하지만 폭주로 인한 터널의 통과는 지나친 ‘눈부심 효과’로 인한 파국으로 심심찮게 나타난다. 터널 속 어둠이 주는 좁은 시야가 과속이라는 원인과 결합할 때 빛은 오히려 환상으로 자리할 뿐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우스갯소리로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급격한 흥분으로 하나의 문제에만 빠지다 보면 객관적 판단도 주변의 충고도 어느 것 하나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분노의 폭발만이 치유의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민주당의 개혁과정을 보노라면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엉망진창인 나라로 보인다. 내란세력의 국기 문란과 정치 검찰, ‘침대 축구’로 빗대어지는 사법부의 재판과정과 내란에 동조한 공무원 세력 등 그 어느 하나 정상적인 기관이 없다. ‘헌법 존중 태스크포스’를 가동하면서 내란 동조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공직자의 휴대폰 제출을 유도하고 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내란 극복도, 적극 행정 권장도 모두 해야 할 일”이며 “신상필벌은 조직 운영의 기본 중 기본”이라고 힘을 실어주고 있다. 종묘 앞 고층건물과 ‘한강 버스’의 운행정지에 대한 민주당의 ‘오세훈 시정 실패 정상화 태스크포스’와 ‘새서울 특별위원회’는 지방정부마저 개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모두가 개혁과 척결의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썩은 곳이 있다면 도려내야 환부에 새살이 돋는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하지만 잘못된 진단과 과도한 수술은 오히려 환부만 아니라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다. 지난 15일 이낙연 새미래민주당 상임고문은 “피고인 대통령을 무죄로 만들려고 법치주의를 짓밟는 일은 이미 계속되고 있다”라며 헌법 존중 TF의 헌법 위반과 파괴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은 전체주의로 질주하는가”라며 검찰청법 개정안·검사징계법 폐지안과 관련해 대장동 항소 포기를 비판한 검사들을 ‘항명’으로 단죄해 파면하는 것을 반대한다. 민주당 강성 지지층은 ‘수박’이 된 사람의 ‘헛소리’라고 평가절하할지 모른다. 하지만 ‘좁은’ 시야에 의지한 채 폭주하는 자동차의 운명처럼 국정의 위태로움이 더 커질까 두렵다. 민심을 거스르는 ‘사적 분노’로 의구심을 살까 두려운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