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현랑 소설가, ㈜플립온코리아 지역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신현랑 소설가, ㈜플립온코리아 지역문화콘텐츠연구소장

APEC 정상회의는 여러모로 화제를 낳았다. 시진핑 주석에게 선물한 황남빵은 만들기 바쁘게 동이 났고 깐부를 맺은 재벌들이 회동한 치킨집은 단숨에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각국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건배주도 경쟁이 치열했다. 정상들의 만찬에 오른 전통주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이번 APEC 정상회의에는 생막걸리가 지정되어 우리 술에 긍지를 갖게 했다.

전통주의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제사 때나 명절에 주고받던 단순 선물용에서 벗어나 다양한 제품 브랜드로 재탄생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지역 특산물을 접목한 막걸리의 고급화를 추진하였고, 기존의 약주와 소주도 특색있어 골라 마시는 재미를 더했다. 자부심을 가진 명인들이 빚은 전통주, 대대로 내려오던 비법을 재현한 종가 가양주의 활약도 돋보인다. 이제 뛰어난 우리 전통주가 한국을 넘어 세계적 명품 브랜드로 거듭날 때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주를 보면 맛과 향, 세련된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잘 입힌 스토리텔링의 비중이 크다. 중국 백주 ‘수정방’은 술병 밑바닥에 육각형으로 오목하게 홈을 파 이야기를 올려놓았다. 육각 면에는 당나라 시인 두보와 촉나라 시절 성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수정방은 육백 년간 명맥이 끊겼다가 14세기로 추정되는 대규모 양조장 유적에서 발견된 효모 덕에 양조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이후 오랜 역사를 스토리텔링하여 명품화를 이뤄냈다.

영국의 ‘로얄 샬루트’는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술로 ‘여왕의 위스키’라 불린다. ‘로얄 샬루트 21’은 대관식에서 쏘아올린 21발의 예포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으며 현재까지 왕실의 고귀함을 상징하며 소비자에게 여왕의 품격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에도 집안마다 내려오는 가양주가 있다. 일제강점기 쌀을 수탈하려는 주류면허정책으로 대부분의 가양주가 사라졌지만, 종가의 노력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경주를 대표하는 교동법주는 최부잣집의 가양주로 35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조선 숙종 때 사옹원에서 참봉을 지낸 최국선이 낙향하면서 후손들에게 비법이 전해졌다. 찹쌀, 누룩, 뜰 안에 있는 샘물로만 빚어야 그 맛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안동소주 제조법은 고려 충렬왕 때로 추정한다. 안동에 원나라의 일본 원정 병참기지를 두었는데 몽골 풍습에 익숙한 충렬왕을 위해 안동 사람들이 증류식 소주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쌀, 누룩, 물로 만들어진 안동소주는 서민들의 배앓이, 소화불량에 활용하던 약용술이었다.

태사주는 고려 건국 이야기를 입혀 승리를 자축하는 술로 알려졌다. 고려 태조가 안동 호족의 도움으로 견훤군과 맞설 준비를 하던 중, 주모 안중이 만든 술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이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감정을 건드리는 작업이다. K- 문화가 이슈를 불러온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감성이 통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은 오랜 문화를 녹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상품에 관심과 흥미를 더한다. 다양한 맛과 향, 멋이 가득한 우리 전통주에 필요한 것은 품격을 높여줄 이야기이다. 전통주는 그냥 우리 술이 아니라 오래도록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역사가 녹아 있고 봉제사 접빈객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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