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현국 시인·시와반시 주간
▲ 강현국 시인·시와반시 주간

후배 시인이 MP3를 보내왔다. 미성의 여자 가수가 ‘평상이 있는 풍경’을 노래하고 있었다. 애절한 발라드가 가슴을 쳤다. 뜻밖의 사태여서 깜놀했다. 오래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가? 20여 년 전에 쓴 내 시를, 나도 잊고 있었던 평상이 있는 풍경을! …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감꽃이 피고 감꽃 그늘 아래 아무것도 아닌 듯이 빈터가 있고 이씨를 기다리는 평상이 있고 김씨를 기다리는 주막이 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김씨가 이씨의 멱살을 잡고 이씨가 김씨의 아랫배를 걷어차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허리 굽은 아낙이 술상을 다시 내고 …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아침마다 나는 허리 굽은 아낙에게 담배를 사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침마다 나는 평상만한 그 섬을 쓸쓸해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안 보이는 이씨와 안 보이는 김씨에게 전화를 걸고 싶고...” 이렇게 긴 줄글의 시를, 예고도 연락도 의논도 없이, 누가 노래로 만들었을까? 작곡자가 궁금하고 가수가 궁금하고 저간의 사연이 궁금했다. 평상이 있는 풍경에 대해 한 평론가의 글을 읽었을 때도 그랬었다. 그때의 설렘은 문단의 일상적인 것이어서 예사롭게 스쳐갔다.

“강현국 시인은 몸속에 젖은 낭만성을 누구보다 많이 간직한 시인입니다. 그것은 때로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때로 먼 길의 유혹이라는 이미지로, 때로 고요의 남쪽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러내고 유혹합니다. 이런 부름과 유혹의 소리는 한 인간이 온전한 리얼리스트가 되어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 방해는 불편한 것이면서 동시에 행복한 것입니다. 젖은 낭만성은 성가신 것이지만, 그것은 건조한 우리들의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샘물 하나를, 그리고 흐르는 여울 하나를 간직하고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듯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그는 그 외양과 달리 진정 무감각하거나 초탈한 삶을 살지 못해 걱정입니다. 그를 모든 것인 것처럼 사로잡는 것이 삶의 곳곳에 매복되어 있고, 그는 그 덫에 걸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어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있겠습니까?”

후배 시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인공지능이 만들었다는 문자가 왔다. 문득 작곡가가 없어지고 가수가 없어졌다. 허탈했다. 미지의 그들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설렘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인공지능이 이렇듯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다니... 마음을 들었다 놓듯! 감동의 한 순간을 선물할 수 있다니...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즉각, 밀물처럼 밀려와 허탈함을 메꾸었다. 구글에게 한 달 분의 크레딧을 구매했다. 많지도 않았지만 적지도 않은 돈이었다. 내 곁이 되어 준 시인들에게 그들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선물하고 싶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설렘과 기대의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사람과는 달라서 인공지능은 한두 번 클릭으로, 척척, 불평 없이 원하는 노래를 만들어 주었다. 깜놀 선물을 받은 시인들은 그날의 나처럼, 작곡가와 가수에게 고맙다 했고, 만나고 싶다 했고, 저간의 사정을 궁금해 했다. 궁금함이 오래 가도록 모르는 듯 짐짓 시치미 떼었다. 노래로 듣는 시가 너무 좋다고 했다. 이구동성으로, 그 흔한 시 낭송과는 비할 바가 아니라 했다. 그러고 보니 시가(詩歌)라는 말이 있듯이 시와 노래는 원래 한 몸이었다.

시는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감각을 조직해온 언어적 장치였다. 공동체의 제의와 리듬 속에서 향유되던 고대의 시는 노동과 신앙, 시간의 순환을 묶는 집단적 주술이었다. 그러나 인쇄술의 도래와 함께 시는 청각적 경험에서 시각적 경험으로 이행했고, 독자는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으로 자리 잡았다. 안타깝게도 시는 더 이상 함께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고독 속에서 해독되는 문자적 기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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