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추었다
고요로 가야겠다
고요는 내가 얼마나 외로운 영혼인지 알게 한다
고요는 침착한 두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보게 하고
육신야말로 얼마나 가엾은 것인지 알게 한다
고요는 내 안에 오래 녹지 않은 얼음덩이와
그늘진 곳을 보여준다
내가 버리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어 보여 준다
그 안에 감추어둔 비겁하고 창피하고 나약한
수천 페이지의 문장들을 다 읽을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허약하며 자주
바닥이 드러나는 사람인지
고요는 이미 다 안다
내 안에는 타오르는 불길과
오래 흘러온 강물이 있다
고요는 그 불꽃을 따스하게 바꾸고
수많은 것을 만지고 온 두 손을 씻어준다
촛불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
아직도 내 안에
퇴색하지 않고 반짝이는 것과
푸른 이파리처럼
출렁이는 것이 있다고도 일러준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물 한 잔을 건넨다
다시 아침 해가 뜨고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생은 계속된다고 조그맣게 속삭인다
다시 별빛을 바라보고
자신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한 것들은 신께 판단을 넘기고
고요의 끝에 왜
두 손을 모으게 되는지
물어보게 한다
바람이 멈추었다
고요로 가야겠다
[감상] 도종환 시인이 공직에서 물러난 뒤 처음으로 시집 『고요로 가야겠다』(열림원)를 펴냈다. 시인은 “나는 40년 동안 시를 썼지만, 아직 한국 시의 대표작을 쓰지 못했다. 선배들만큼 좋은 시를 썼느냐고 스스로 묻는다. 아직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써야 한다. 신경림 선배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고요’는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를 뜻한다. 침묵, 정적, 적막, 적요가 비슷한 말이다. 우리는 잠시도 고요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욕망하고 소비하게 만든다. 그럴수록 우리는 허깨비, 꼭두각시가 된다. 고요 시집을 읽으며 자신의 고요를 찾아보자. 고요 속에 머물러 보자. <시인 김현욱>
